하루히에게.
일어나보니 내가 없어 놀라셨을 줄로 압니다. 혹시 이전처럼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는 건 아닐는지. 그러진 말아주세요. 날이 찹니다. 몸 상해요. 이러면 또 어린아이 취급을 한다고 싫어하려나. 그런 게 아닌데…….
참… 벌써 몇 단어를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펜과 종이로써 너(몇 번을 썼다가 죽죽 그어놓은 흔적.) 당신 앞에 섭니다. 말하자면 사적인 글 자체가 무척이나 오랜만입니다. 교복을 입고 있을 때여야 쓸만한 일이 있었으니 얼마 만이겠습니까.
이렇게 글로써 당신을 만나고자 한 건, … … 그냥. 하고싶은 말이 있는 탓입니다. 사실 편지를 쓰고는 있지만, 이렇게 쓴 글이 당신에게 전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민이 많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며칠을 걸려 쓰고, 날인까지 찍어놓고는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품에 안고 와버릴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대할 때 내가 한참을 아니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래서, 이 편지는 당신에게 전해졌습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나로써는 알 수가 없군요.
사실 당신이 곁에 있으면… 글에서마저 사실을 담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으므로 이 편지를 쓰기만을 위해 굳이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을로 나갈 필요가 없었는데도 굳이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붙여가며 종이와 펜들만 가방에 넣어서요. 당신은 이 모든 것이 거짓말었다는 걸 아셨을 테지요. 당신이 불만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얼굴에 지금도 양심이 따끔거립니다.
간혹 당신이 내게 투정을 부리거나 속상해할 때를 생각합니다. 당신이 내 품 속에 더 깊이 파고들거나, 슬그머니 입맞춰올 때 말입니다. 그럴 때 나는 곧잘 당신을 밀어내곤 했습니다. 당신이 날 더 품지 않도록. 왜 당신 앞에서는 나는 퍽 노력하고 있는데도 언제나 못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걸까요. 당신이 아시다시피-당신은 언제나 나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으므로 이리 단정합니다- 나는 겁이 많고 치사합니다. 무언가를 끌어안는 것이 익숙하면서도, 똑같이 남에게 떠넘기는 것 역시도 당연스럽게 해버리고 맙니다. 무언가가 두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대체 무엇이 이리도 두려운 것인지. 무엇이 당신 곁에서 느끼는 안정감 사이로 나를 순간순간 바닥으로, 진창으로 처박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당신에게 비밀로 성당에 다녀온 일도 있습니다. 가서 전부 털어놓으면 무언가가 변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당신에게 이러한 감정을 느끼기 전으로, 당신의 시선이나, 손길따위를 느끼기 전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지도요.
하루히, 나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습니다. 그 성스러운 공간에 서서, 다정하고 상냥한 말씨, 신 아래에 선 이들이 느끼는 황홀함 따위를 목도했는데도 내 안에서는 무언가 변하지도 않았으며, 되돌아가는 일도 없었습니다. 신이 무언가 내게 커다란 죄책감을 내리꽂고, 감았던 눈을 뜨듯이 당신에게서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을 굳힐 수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테고,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을 깨닫고 왔습니다. 이 얼마나 우스운 깨달음입니까. 이 얼마나….
더 우스운 것은 당신을 밀어내고, 선을 지키려 하면서도, (조금 머뭇거렸는지 잉크가 뭉쳐있다.) 이럴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입니다. 나는 옳은 일만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다가도 가끔은, 치명적으로 나쁜 짓들을 저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는 당신과 나를 손가락질할 얼굴 모를 사람들의 걱정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모두가 무슨 소용인지, 그저 당신만 생각하고 싶단 생각을 합니다. 호그와트에 입학하기 전처럼. 다른 모든 외부에서 우리를 격리시키고 믿을 것은 당신과 나 뿐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을 나라고 안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이 잠든 얼굴을 보고 다시 잠에 들곤 합니다. 익숙한 일입니다. 당신이 내 곁에 없던 날들에도 난 새벽에는 언제나 잠이 깼고, 옆을 짚어본 다음에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습니다. 어느 날엔 새벽에 잠이 깨어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젠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잠들어있는 당신을 내게서 떼어낼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새벽이라 방은 어둡고, 달빛에 은은하게 당신 얼굴만이 비춰보였습니다. 힘이 빠지더군요. 마냥 내게 안겨있는 당신이 기껍고, 나를 안고있는 손과 팔의 힘이 그리 세지도 않은데, 어쩐지 나는 그 팔을 떼어내는 것을 할 수 없어 그대로 다시 당신을 끌어안고 잠에 들었습니다.
가끔 그렇게 당신의 몸을 끌어안고 숨만 몰아쉬다보면, 나는 가끔 정말, 참을 수 없이 절감하고 맙니다. 아, 나한테 남은 것은 이 애 하나 뿐이구나. 하는 아득함과, 아, 나에게 이 애 하나는 남았구나, 하는 안도. 내 품에 안겨오는 무언가가 있고, 그게 당신이라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하하. 환희라니요. 나는 정말 매순간 불안했습니다. 정말, 만에 하나 정말로 무언가가 나의 귀를 막고, 나의 눈을 가린다면 나는 이 상황에 만족하고야 말거라고. 그저 이 존재감에, 간혹 들려오는 숨소리같은 웃음에 마냥 잠겨있기만 할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사람은 분명 당신일 거라는 사실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언제부터 내가 당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였더라, 봐버리면 끝이라는 생각을 했거든. 나는 스스로가 조금 미련하고 바보같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 앞에서는 유독 끝없이 정도도 모른 채 휘적휘적 끌려다니는 여자가 된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대체 얼마나 노력을 했던지… 얼마나 부단히도 발버둥을 쳤는지. 당신의 시선에서 어떠한 의도나, 감정이나, 애정이나. 다른 사람을 볼 때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않으려고 당신의 눈에서 얼마나 시선을 돌렸을까요.
그러다가도 당신이 날 매만질 때, 가끔 낯설게, 하지만 퍽 부드럽게 웃는 양을 봐버리고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신은 아마 모를 겁니다. 나를 볼 때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로서는 평생 짐작도 못하는 것처럼. 당신이 종종,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전혀 모를 거라고 말하던 것처럼요. 이런 고해에 가까운 글을 당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 당신에게 보여주지 않을 셈으로 늘어놓는 제 심경도 당신은 아마 전부는 알지 못할 겁니다.
… 아십니까. 나는 당신이 날, 줄곧 그렇게 보며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이에 간격이 퍽 넓다.) 입맞추고 싶어집니다.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은 양, 누구도 나를 두렵게 할 수 없는 것마냥 눈을 감아버리고, 기꺼이. 기꺼이, 라고 대답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쁜 것을 매만지는 듯한 그 당신의 손길을 뿌리치거나, 당신 곁을 거부하고,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고갤 내젓거나 하지 않고, 그냥 목에 팔을 두르고 싶어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또 참고 당신을 밀어냅니다. 당신이 가는 그 순간까지 나나, 나와의 관계가 당신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게 참을 수 없이 싫습니다.
그래서 이 감정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생 그저 당신의 유혹에 쉬이 흔들리는 여자인 양 굴면 내가 우스워지겠지만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고싶지 않았습니다. 버틸 수 있다면 끈질기게 버티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이 세상에서 내 마음 하나 정도는 멋대로 하고싶었습니다. 허나 참, … 평생을 제 삶이,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그러했듯이, 그 무엇도 쉽지 않더군요. 이 편지가 쓰여진 것이 내 패배의 증명입니다.
마지막은 기어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졌을지에 대한 문제겠지만, 그것은 그 때의 제 자신에게 맡겨봅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의 패배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당신은 이전부터 타인에게는 최소한의 관심만 갖는 부류의 아이였으니, 그다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기로 합니다. 이건 무엇에 대한 글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아는 호즈노미야 후유키가 스스로의 패배를 선언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신 누이가 짧디짧은 평생을 거쳐 한번도 그래본 적 없으면서도 이번에야말로 이 뻣뻣한 고집을 당신 앞에서 기어이 꺾어보기 위해 펜을 들었다던가. 혹은, 당신과 나를 둘러싼 관계를 마주한 채 여직 정의하지 못한 흔들리는 감정들을 내뱉는 시시한 고백을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이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편지지 위에서야 겨우 해본다던가. 그런 것따위는 생각하지 않고서요.
이런 시덥잖은 글을 읽고, 당신이 이것을 어찌 생각했을까요. 시시하고 초라하다 생각했다면 정답입니다. 내가 하는 고민 따위는 당신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것을 아니까요. 조금 웃으셨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내가 매번 당신에게 말하던 것과는 다르게, 나는 당신을 마냥 미워하고 싶진 않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싶지 않다는 말 정도는 조금의 진심일지도 모릅니다. 허나 이는 후회도, 원망도 아닙니다. 이미 늦은 일에 대한 내 감상입니다. 내가 당신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순간순간 차오르는, 가슴이 퍽퍽하니 막혀오는 감정들을 내가 느낄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요. 당신을 사랑스럽게 느끼지도 않고, 원망스레 느끼지도 않는 날이 왔다면 나와 당신의 미래는 조금 달라졌으려나요. 당신은 그리 말하겠지요. 아니, 하고요.
그래서, 하루히. 내가 당신께 이 길고 긴 편지를 쓰며 이 많은 문장들이 맴도는 핵심은 하나의 고백입니다. 나는 포기하기 위해서 쓴 게 아닙니다. 이 글은, 내가 바라는 것을 또 한번 내버리기 위해서 쓰인 게 아닌 겁니다. 토해내고 비워버리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냥. ... (한참을 점이 찍혀있다. 그 뿐이다.)
추신. 이 편지는 정말로 네게 전해지긴 할까?
호즈노미야 후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