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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20200715 EP01. 후유키 개인로그
00. 결국 호즈노미야 후유키는 견디지 못하고, 살면서 발도 들여본 일 없었던 성당에 들렀다. 세계 멸망을 앞둔 것이 실감이 났다.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성당은 조용했고, 때문에 다른 이들이 기도문을 외는 소리가 귀에 슬그머니 박혀왔다. … 혹은 작은 방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이나. 조용한 공간은 익숙했다. 애초에 경계심이 흐트러질까 사람이 많은 것이 불편했기에 사람이 적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원래도 단정했던 자세를 여러번 고쳐 곧게 허리를 세웠다. 성당이라는 장소의 특수성 때문일까 바삐 지나다니는 수녀님이나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을 스쳐지나간 신부님은 물론이고, 그 안의 모두가 그 자신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언제나 잘 몰랐기에, 그저 시선을 내리깔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최근 들어 곤란할 때에 으레 나오게 된 습관이었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 고개를 들면, 후유키는 성당이 너무도, 너무나도 성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즈음 눈이 발개진, 수염이 듬성듬성 난 사내가 고해성사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제 차례였다. 사내는 그 방에서 한참을 앉아서 훌쩍거렸는지, 작은 방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의자는 나무로 되어있었고, 오래 사용되었던 건지 반들거렸다. 후유키는 방에 발만 들인 채 조금 머뭇거리다, 이내 문을 닫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괜히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방은 생각보다 어두웠고, 그 덕분인지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던 그는 숨을 들이쉬고 잠시 긴장을 풀었다. 01. 말하자면, 이 관계가 이정도로 일그러져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고해부터 시작해야 했다. 아니, 되돌릴 수 있거나, 거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과소평가해왔다는 것이 옳았을지도. 02. 사실, 그들 쌍둥이는 특이한 성장 배경에서 자라온 주변 이들 사이에서도 유독 특별한 관계였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누나나, 그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동생. 걱정스러울 정도로 의존적인 사이인 것은 명확했으나 자라온 환경이 평범하지 않았기에 적당히 참작되고 있었을 뿐이었을지도 몰랐다. 지금껏 누군가가 그에 대해 건드려도 후유키가 큰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린 후유키에게 있어 하루히의 존재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 ‘기한이 있는 목표’의 개념에 속해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히를 잘 부탁한단다, 후유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렸던 날이다. 커다란 집에서 믿을 것은 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된 그날. 걱정마세요, 어머니, 아버지. 제가 하루히를 지킬게요. 저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 어쩔 수 없이 세상은 변화했다는 것을 피부로 알았으나, 후유키는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스스로가 짊어지게 된 무언가에는 결국 끝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나의 목숨을 짊어지는 것이 버겁다 여기지 않기에는 어린 호즈노미야 후유키는 그저 조금 책임감이 있을 뿐인 어린 아이였다. 하루히의 곁을 맴돌면서도 가끔은 어느 날 어느 순간, 결국엔 졸업하게 될, 그 날까지 당연히 안고가야 하는 의무 따위라고 생각했다. 그의 약하고 위태로운 동생은 아주 긴 기간동안 천천히 지켜나가야 할 어떠한 과제같은 존재였다. 03. 끝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후유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끝까지 나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가능성 차원의 문제였지. 저택은 쓸데없이 컸다. 세상은 죽어가고 있었고, 사람 또한 세상에 속해있는 것은 마찬가지인지 픽픽 죽어나갔기에 그 큰 저택이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어린 동생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를 선물 따위 탓에 쓰러져 며칠밤을 죽어가다 살아나곤 했다. 조용한 방에서 하루히의 식은땀을 닦으며, 괘종시계의 초침이 넘어가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들으며 몇 번을 후회하는 것 역시 익숙한 패턴이었다. 하루하루가 위태로웠고 제 동생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 그 옅은 숨을 붙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후유키의 할 일이었고, 존재 이유였다. 그리고 반복이란 참 무서운 것이었다. 후유키는 1 년, 2 년이 지나며 어렸던 자신이 천천히 스스로의 ‘누나’로서의 역할에 몰입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동생의 안색에 일희일비하게 되고, 옅은 기침에도 온몸에 긴장감이 돌고, 사소한 변화나 공기의 긴장감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되고. 누나, 하고 불러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다던가.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동생의 바로 곁에서 수많은 악의를 견디고 버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릎이 깨지는 것보다 그 애의 손가락이 종이에 베이는 게 더 큰 상처로 받아들여졌다. 잠을 오래 잘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헌신은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호즈노미야 후유키가 그의 동생에게 얽매이면서도 이 관계는 특수한 상황에서 엮인 어떠한 ‘상태’로 받아들였던 것은, 이 모든 것이 끝이 나면 쌍둥이는 서로에게서 독립하여 따로, 또 함께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탓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퍽 오래 유지되었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가 동생 곁에 머무르면서, 이것이 적어도 그에게는 평범하고 당연한 삶의 형식이라는 생각을 천천히 갖게 되었음에도. 열 넷이 된 후유키가 생각하는 그의 미래는 언제나 이러했다. 훤칠하게 자란 동생은 호즈노미야의 가주이자 시계 장인이 되어 스스로의 일을 하고, 자신은 그 곁에서 가문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돕거나, 혹은…. 이 이후의 상상은 명확하지 않았다. 무얼 하든 간에 호즈노미야 저택에서 가까운 곳에서 지내게 되겠지, 따위의 것들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것이 호즈노미야 후유키에게 있어서 ‘행복’에 가까운 형태로 굳어지고 있었다. 아, 얼마나 평화로운가! 죽음의 위협에 덜덜 떨 일 없는 ‘우리’라니. 세상 사람 모두에게 느끼는 어떠한 형태로의 공포가 사라지는 날이라니. 이유없는 호의에서 느껴지는 그 불쾌한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이라니. … 그 애가 자유로워지는 날이라니. 후유키는 그제야 작게 웃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새에 햇볕이 새어드는 것도 같았다. 03-1. 누나, 가려고? 나를 두고? 열 다섯이 된 그는 처음으로 제 품에 안겨 저를 바라보는 동생이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그리 느낀 것이 언제인지는 모르나, 자신이 그 느낌을 인지한 것은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착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명확하게 존재하는 순간이었다. 호즈노미야 후유키는 자신이 본 적 없는 눈빛을 하고 있는 하루히를 종종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전에도 그런 얼굴은 종종 볼 수 있었지만 보통 타인을 향한 것이었으며, 후유키는 다양한 이들과의 상호작용 중에서 자신이 모르는 얼굴 하나 둘 즈음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여겨왔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을 향한 낯선 얼굴을 그는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몰랐고, 그럴 즈음 하루히는 누나, 하며 익숙한 얼굴로 다시 안겨왔다. 04. 안타깝게도 후유키는 간혹 제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동생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6학년의 그날, 그를 압도해버린 것이 배신감일 수밖에. 케이이치 씨가 변명 따위를 할 법한 사내도 아니었기에 용건만이 깔끔하게 적혀있는 편지가 그리 긴 문장으로, 어려운 단어들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되어있던 것도 아니었으나, 후유키가 그 짧은 한 장 짜리 편지를 전부 읽어내려가는 것에는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끝이었다. 실패라는 다정한 단어가 아닌, 기회의 박탈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 실패는 돌이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 눈을 뗀 사이 유독 몸이 약해진 하루히가 발작으로 쓰러졌다던가 하는 그런 실책 따위가 아니었다. 후유키는 발 밑이 꺼져 내려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늪 속을 기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으로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병동으로 걸어가는 동안 아는 얼굴들이 몇이고 찾아와 하루히와 다른 학생간의 싸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 후유키는 저를 토닥이는 손길을 내치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참아내었다. 세상이 시끄러웠다. 저를 보며 언제나처럼 미소짓는 동생의 뺨을 내려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입을 몇 번 달싹여도 나오지 못한 한마디는 ‘감히’였다. 화를 표출하는 것에 있어 호즈노미야 후유키는 언제나 서툴렀다. 그 곳이 병동이라는 것도 잊고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으나 목이 턱 막혔다. 이 갈 곳 없는 절망을 어떻게 해소해야할지 눈 앞이 캄캄했다. 호즈노미야 후유키는 곧바로 뒤를 돌아, 병동을 나서며 억지로 생각했다. 그래.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 있었어. 그런 것으로 생각해. 재앙이란 그런 것이었다. 죽는 이들을 그리도 많이 보지 않았던가. 하루히는 오래 버텼던 것이다. 후유키는 그리 납득하려 생각을 이어나갔다. 끝을 생각해본 적 없어? 일찍 왔다고 생각해. 결국 맞이할 끝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벗어나는 날.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어. 후유키는 복도를 한참 걷다가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무너졌다. 신이시여, 이렇게는 아니었어요. 호즈노미야 후유키는 여기까지 말을 하고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반쯤은 헛웃음이 섞여있었다.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전에, 그는 좁은 방을 다시 훑어보았다. 여전히 그 곳은 성당이었고, 옆 방에서는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내가 성당에 오다니. 신은 지금껏 아무런 말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후유키는 자조했다. 05. 그 이후 며칠, 수업을 듣는 시간 외에는 연회장에도 나오지 않고 기숙사 방 책상에 엎드려있는 날이 사흘째가 되자, 지미니는 무슨 일이냐며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속이 안좋아서 그래.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을 하면 지미니는 하루히는 아파도 금방 괜찮아졌잖아요? 또 마구 저를 괴롭…! 아니, 괴롭힌 건 아니구요, 하며 손을 살래살래 내저었다. 후유키는 조금만 더 쉬면 괜찮아질 거라며 다정한 제 친구를 다독였다. 그리고 나흘 째 되는 날, 호즈노미야 후유키는 퀴디치 팀을 그만두었다. 취미 생활도 이쯤 해야겠다는 것이 사유였다. 그 이후로는 케이이치 씨에게 편지를 몇 장 보내고는, 어딘가에 홀린 것마냥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어댔다. 이것이 제 치료법을 찾으려는 것인 줄을 아는 하루히는 종종 찾아와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시간낭비 하지 말라며 제 손을 잡아 끌었다. 후유키는 그 손길이 어쩐지, 다정하여 싫었다. 동생의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다. 얼굴을 보면 함께 살 방법을 찾아보자며, 제가 노력하겠다며 죽음을 앞둔 하루히에게 매달려 허덕일 것이 뻔했다. 헛된 희망을 받고 싶지도, 주고 싶지도 않았다. 평소대로라면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그저 마지막까지 동생의 곁을 지키며 아름답고 고고하게 그를 보낸 후에, 오래도록 그리워했어야 했다. 무엇보다 그는, 그 자신이 어떠한 이유로든 동생을 더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반 년에 가까운 시간을 헛되이, 또한 필사적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상적인 결말은 후유키 자신이 몸이 건강해진 하루히를 직접 제게서 떨어뜨려 놓고, 그가 어떻게 대응하더라도 곧 천천히 독립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 이 관계의 끝은 후유키가 맺어야 했다. 그랬기에 이런 형태의 끝을 인정할 수 없었다. 감히? 다시 채 나오지 못한 목소리가 제 귀에 웅웅거렸다. 그래, 전부 우스운 핑계였다. 호즈노미야 후유키는 그런 스스로가 이기적이고 추하다고 생각했다. 고질적인 습관이었다. 그는 제 동생을 돌보면서 쌓아온, ‘올바른 호즈노미야 후유키’로서 존재하는 것에 어떠한 고집이 있었다. 욕심이 없고, 이타적이며, 겸손하고, 단정하며… … 후유키는 이 즈음에 하루히와의 단절을 결심했다. 머글 사회를 헤매던 때였다. 우습게도 그러면 역으로 제가 의존하고 허덕이는 모양새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06. 그리고 호즈노미야 후유키는 그것이 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게 오는 편지에 답장을 한 통도 보내지 않으면서 하루히의 건강에 어떠한 문제라도 생겼을까 편지는 죄다 뜯어보았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운 좋게도 둘 다 살아있었고, 안타깝게도 어둠의 마왕을 불러내어 하루히의 건강을 고치는 것에는 실패했으며, 그런데도 세상은 금방 눈 깜짝할 새에 멸망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이라도 눈이 내릴 듯 추웠을 뿐. 후유키는 그 자리에서 얼른 벗어나야 했다. 후유키, 나 없이 살 수 있어?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이 목 끝까지 차올랐기에 더더욱 그래야 했다. 너도 죽을 거고 나도 곧 죽을 거라면 이것이 옳은 선택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어떠한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이성의 손을 드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정답이라 믿었다. 이번에도 그래야만 이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딱 세 걸음 걸었을 때 뒤에서 저를 얽어매는 목소리가 들렸던 것을 그는 기억해냈다. 후유키… 그 목소리를 더 들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바삐 발걸음을 재촉했는데도 그게 쉬이 되지 않았다는 것도. 그 애가 뱉은 작은 욕지꺼리가 발목을 줄곧 따라왔지만 뒤를 돌아서는 안됐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저는 그 애가 얼마나 아픈지 온전히 알지도 못한다는 점이 문득문득 그를 멈칫거리게 만들었다. 내가 그렇게나 끔찍해?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대답을 종용하듯 후유키, 하고 부르는 소리가.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제 길을 가는 것 마저도 어째 쉽지 않았다. ㅡ하루히와 재회한 것은 딱 보름 후였다. 숨으려면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우습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리 도망친 곳이라 해봤자 호즈노미야 저택이 있던 도시와 그리 떨어지지도 않은 작은 시골 도시였던 것이 문제였다. 혹은 영국에서는 특이한 이름 축에 속하는 이국적인 제 이름이나 얼굴을 바꾸지도 않은 채 돌아다녔던 것이 문제였을지도. 호즈노미야 저택의 소식이고 뭐고, 무엇이든 간에 들을 수 없는 외딴 마을까지 흘러들어갔어야 했다. 시계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구석진 곳으로 갔어야 했는데, 정신 차리니 몸을 맡긴 곳은 그곳이었다. 더 멀리는 갈 수 없었다. 몸은 이미 한계였다. 작은 여관에서 방 하나를 빌려 쓰러지듯 잠이 들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새벽 두 시에 깨었다 다시 잠들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깰 때마다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그리고 다시 잠들고, 다시 눈물 젖은 얼굴로 깨어났다. 그렇게 3시간마다 한 번씩 깨고, 다시 기절하듯 잠에 빠지는 것을 반복하며 사흘이 지났고, 죽은 줄 알았다며 오늘도 안 일어나면 문을 부술 뻔 했다며 조잘거리는 수다스런 여관 주인의 말을 들으며 스프를 얻어먹는 것을 유일한 일과 삼으며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을 잠만 내리 자니 일어나니 걷는 것도 온전하지 않은 데다 여관 주인이 오지랖을 부려대는 통에 마을을 구경하며 걷기 시작한 것이 또 일주일.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비가 눈이 되었다가, 눈이 비가 되기를 반복하던 날씨만 이어지더니, 그 날에는 마른 눈이 잔뜩 내렸다. 07. 눈이 어찌나 내렸는지, 눈을 밟는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오랜만에 한참 들을 수 있었다. 후유키.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도 산뜻했기에 그는 제가 또 환청을 들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저 더 들은 적 없을 정도로 다정하고 산뜻할 뿐, 목소리가 흐리거나, 떨리거나, 화를 참고 있거나, 혹은 고통을 참는 것 같은 기색이 없다는 것이 이상했으나, 제 이름을 부르는 환청 자체는 보름 내내 종종 들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다. 미간을 꾸욱 누르며 이것 역시 곧 괜찮아질 습관같은 것이겠지, 생각할 즈음에 그 목소리가 한번 더 들려왔다. 후유키. 후유키는 이번에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찾았잖아. ...맙소사. 웃음기 담긴 나른한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눈이 마주쳤다. 퍽 오래 바깥에 있었던 모양인지 하루히의 코와 귀가 빨갰다. 후유키는 무어라 말을 했고, 하루히는 낯색이 창백해진 채로 말갛게 웃으며 다가왔다. 나 아파. 후유키는 뒷걸음질을 치지 못했고, 하루히는 그 앞에서 마른 나뭇가지처럼 쓰러졌다. 열이 펄펄 끓는데도 안색은 창백했고, 손발은 차가웠다. 그는 그를 받아 안은 채로, 여관으로 비틀비틀 뛰었다. 오면서 먹느라 얼마 안 남은 건지, 하루히의 가벼운 짐에는 남은 약들이 변변찮았다. 후유키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하루히의 곁에서 물수건을 바꾸며, 하루히가 들고 온 몇 안되는 약을 먹이며 간호했다. 숨이 끊어질 듯 앓던 하루히가 눈을 뜬 것은 만 하루가 지나서였다. 후유키는 하루히가 눈을 뜨면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으라고 첫 마디에 내뱉을 생각이었다. 후유키, 돌아오는 게 늦어. 찾으러 왔잖아. 기침을 이어가다 입만 달싹이며 겨우 읊는 말에 힘이라곤 없었다. 눈은 흐렸지만 하루히는 웃고 있었다. 후유키는 입술만 짓씹다가 마른 손을 들어 제 볼에 가져다대었다. 찬 손이 제 뺨을 닿을 듯 말 듯 감싸왔다. 헛웃음이 났다. 그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 후유키는 하루히를 데리고 여관을 떠났다. 08. 호즈노미야? 네가 원한다면 돌아가도 돼. 남은 사람들을 다 죽여도 된다면. 그들이 호즈노미야로 돌아가지 않고 새 터전을 잡기로 한 이유였다. 다 죽이고 오려는 것을 참았다는 것이 하루히가 덧붙인 말이었다. 케이이치 씨와 어떻게든 연락이 닿아 약을 받기로 하고 이동한 곳이 지금 이 마을이었다. 사람은 적고, 옆에는 바다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하루히가 호즈노미야에서 가져온 재산은 천문학적이었기에 집을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하루히는 앓다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또 바삐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대부분의 준비는 후유키가 했다. 마을은 컸고 사람은 적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냈다. 그는 앉아서 책을 읽거나 시간을 보냈고, 하루히는 그 허벅지를 베개삼아 누웠다. 여관에서 지내던 것과 별 차이 없는데 후유키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이 상황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고, 이 장소에서 평온을 찾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곳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가끔 쌓인 눈이 덩어리져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퍼지는 게 전부였다. 하루히는 퍽 기분이 나쁘지 않아보였고, 후유키 역시 대부분의 경우 그러했다. 하루히는 자신이 후유키를 부르면 그래, 하루히. 하고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 좋은 모양이었는지, 종종 이유 없이 그를 불러보곤 했다. 후유키는 가끔 제가 읽는 책의 내용을 하루히에게 알려주었고, 하루히는 그다지 흥미없어보이는 눈을 하면서도 곧잘 들었다. 그런 날의 반복이었다. 후유키가 하루히에게 그 날에 대해 물은 것은 한참 후였다. 케이이치 씨가 보낸 약을 받아 정리하며 후유키는 자신을 찾을 거면 약이라도 더 챙겨오지 그랬냐고 물었다. 언제부터 저를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찾지 못했다면 위험하지 않았겠냐는 질책이었다. 어떻게 자신을 찾았느냐 물어봤자 대답해줄 리가 만무했고, 알아봤자 기분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에 알고싶지도 않았다. 하루히는 자리에 앉은 채로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뱉었다. 무심한 듯 나른한 어조였다. 후유키 너는 네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되물어도 한동안 조용했다. 네가 내게서 떠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는 게 좋아. 지켜보는 건 즐겁지만 짜증나는 건 별개니까. 그러고는 눈 오던 그 날처럼 말갛게 미소짓고는 머리가 아프다며 제 곁으로 후유키를 불러들였다. 그 곁으로 걸어가 허벅지를 내주면서도, 그는 어떤 대답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제 허리를 끌어안은 하루히의, 배에 닿아오는 미지근한 숨결이 어색했다. 열 다섯 살 때 느낀 그 위화감이 제 등줄기를 다시 타고 기어다녔다. 09. 그 말간 웃음과 환한 눈동자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렇게 무언가를 외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그런 적도 없었기에, 열 여덟을 앞두고서야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새로이 알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후유키가 묘하게 저를 옥죄어오는 긴장감을 외면한 시간이 삼 개월이었다. 그 동안 종종 하루히는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등에 고갤 파묻듯이 입을 맞췄다. 제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숨죽이고 있다가도 이내 고갤 들어 저와 눈을 맞춘 채 숨을 옅게 내쉬곤 했다. 후유키는 이런 순간들이 무척이나 곤란했다. 방은 언제나처럼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기에 신경을 분산시킬만한 것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괜히, 흠칫거리는 저도 싫었을 뿐더러,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다가도 이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양 빙긋 웃음짓는 얼굴이. 정말 후유키 자신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하자면… 두려웠다. 이 집과는 어울리지 않은 작은 소란이었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마루를 타고 울렸다. 급히 물러나려고 했으나 이미 그의 손은 잡혀있었다. 목부터 귓가까지가 후끈거려 다른 손으로 제 목덜미를 덮었다. 익숙하지 않은 열기였다. … 너, 그만해. 겨우 말한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뭐를 그만해? 너무도 가벼워서 경쾌하게까지 들리는 대꾸였다. 후유키는 입술을 잠시 깨물다가, 잡힌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제 손을 쥐고 있는 힘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빠졌다. 2년 전에 뺨을 내리쳤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는 언제나 상대가 하루히라면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손을 허공에 툭 떨궜다. 응? 네가 말해봐, 후유키. 뭐를, 묻는 말에 대답은 짧았다. 놔. 손이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후유키가 그 자리를 뜨는 데까지는 조금 간극이 있었다. 다녀와. 잰 걸음으로 스쳐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하루히가 환하게 웃고있었다. 후유키는 그 걸음으로 곧장 마을로 향했다. 정확히는 마을을 지나 인적이 더 뜸해지는 자갈길까지 걸었다. 거부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머리를 내리쳤다. 그리고 시선에 구석진 십자가가 잡힐 때쯤, 정신이 다시 든 것처럼, 혹은 정신이 나간 것마냥 다시 등을 돌려 마을로 돌아왔다. 후유키는 불안했다. 무언가가 제 목을 쥐고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아주 다정한 손길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저를 길들이듯 상냥하게, 제 목에 살짝 얹혀있다는 생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건 자신의 것 같아서 긴장감을 풀게 되다가도, 어느 순간 모르는 이의 손길이 되어 그의 몸을 떨게 했다. 집 앞에 도착할 때 쯤, 후유키는 하루히가 문 앞에 나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날이 추워 얼굴이 붉었다. 숨을 짧게 들이킨 후유키의 발걸음은 뜀박질에 가까워져있었다. 10. 후유키는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오래 말한 탓에 목이 칼칼했고 목소리는 갈라졌다. 낡아빠져 나무에서 누런내가 나는 테이블에 잠시 엎드려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그래서 자신이 신이란 작자에게 무엇을 고해하여 무엇을 용서받고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용서받고자 하는 것을 말하자면 끝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부터 백까지 망설임 없이 나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여전히 그는 이 이상한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점. 하지만 저는 이 작은 방에서 나가면 다시 그 애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 그 애가 앓고 있다면 또 그 애를 두고 나갔던 것을 후회할 것이라는 점, 아마 세계가 온전히 멸망해버릴 때까지 그럴 것이라는 점. 그리고. “ 다음에는 그 손을 뿌리칠 수 있을지도, 이젠…. ” 느리고 미지근한, 간지러울 정도로 가벼우나 저를 움켜쥐고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손길. 숨결. 떨어지지 않는 시선. 웃는 얼굴. 신이시여, 동생과 키스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양 손을 제 얼굴에 얹고 두어 번 강하게 얼굴을 쓸어올렸다. 어린 양이 유혹에 이길 수 있게 하옵시고. 작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기도문을 읊는 신부였다. 후유키는 감았던 눈을 떴다. 역시 이런 곳은 꺼려졌다. 돌아가야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느라 바닥에 지익 끌린 나무 의자에게서 불쾌한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