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즈노미야 하루히는 식은땀에 흠뻑 젖어 깼다. 시간은 낮이었고, 지금이면 후유키는 집에 없을 시간이었다. 빌어먹을. 숨이 막혀 몇 번 거칠게 호흡했다. 길고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것을 반복하자, 그제야 조금 호흡이 편안해졌다. 이번에도 제대로 잠들긴 글른 모양이었다. 몸을 숙여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푹 내쉰 채 호즈노미야 하루히는 생각했다. 내가 미친 건가? 후유키는 이 말을 들으면 기절할 듯 펄쩍 뛰겠지만, 하루히는 제법 스스로의 생각에 자신이 있었다. 함께 죽자고 염불을 외자니 완전히 돌아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호즈노미야 후유키가 눈 내려 차갑게 얼어붙은 바닥에 피투성이로 널부러진 꼴을,
몇날며칠 째 꿈에서 보고 있다면?
*
Last Daydream
마지막 백일몽
*
아, 며칠째 정말 불쾌해서 참을 수 없다.
더 나빠질 구석따윈 이젠 존재하지도 않는 컨디션의 최소한의 조절이나, 후유키가 밖에 나가있는 동안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을 외면하기 위해서, 혹은 세간을 가득 채운 우울에서의 도피 방법으로 하루히는 잠을 선택했다. 때문에 독립 이후, 후유키와 지내는 일반적 하루의 태반을 잠들다 깨다 하며 보내던 하루히에게 악몽으로 인해 수면이 사라진 건 사실상 최악이었다.
사실, 수면 부족은 중요하지 않았다. 생명의 기한이 다 되어 약해진 몸은 약을 먹으면 웬만한 고통에는 둔감해지고, 반쯤 졸린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보통이 된 지가 제법 되었으니까. 그것보다는 꿈에서 깬 이후의 감정의 문제가 더 컸다. 하루히는 꿈의 끝에서 항상 울고 있었다. 세상을 저주하고, 후유키를 저주하고, 신을 저주하며. 하루히는 꿈속에서 무력하게 절망하고 있었다. 채 눈물을 닦지도 못하며 후유키를 끌어안은 채 허공을 노려보는 집념 또한 메마른 가슴께에 그득 쌓여있었다. 덕분에 악몽에서 소스라치듯 급하게 눈을 뜰 때마다 분노와 설움, 억울함이 뒤섞인 끈적하고 무거운 감정들이 머리와 가슴께에 잔존하여 눈 앞이 화끈거리는 것이 문제였다. 속절없이 밀려드는 피로감이 한몫을 하기는 하는 모양인지, 평소보다 더욱 정신이 뒤흔들리는 감각이 역력하여 스스로의 감정조차 잘 컨트롤되지 않았다.
하루히는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숨이 모자라 잘게 들이마시었고. 이내 결국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공기가 순환하여 따뜻하게 덥혀진 몸이 긴장했다. 안개가 짙게 낀 머릿속에 겨울 공기가 가득 들어찼다. 꿈을 담당하는 무의식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차가운 겨울 공기 탓에 어느 정도 가라앉고 있었다. 곧 몸이 다 식으면 눈 앞에 깔린 흰 눈밭조차도 불쾌하겠지만, 당장은 그래도 정신이 좀 깨는 기분이었다.
*
후유키는 또 어디에 일이 있다며 오늘 아침에도 일찍 집을 나섰다. 금방 올게, 쉬고 있어. 미안해하는 어조로 제게 속삭이며 나가는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하루히는 짧게 헛웃음쳤다. 가끔 하루히는 이럴 때,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의 생각이 가끔 궁금했다. 언제는 내가 안 쉬었나. 하루종일 하는 거라곤 너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마 하루히 자신에게도 들법한 수면제를 찾으러 가는 것이려니, 그는 추측했다. 의미없는 짓이었다. 하루히는 제게 드는 수면제가 이제는 몇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 체향 맡으며 기분 좋게 눈 감고라도 있게 제 옆에 있으면 될 것을, 후유키는 뻔한 답을 놔두고 매번 헛짓거리를 하느라 밖으로 나돌았다. 하루히는 후유키가 돌아오면 괴롭혀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제게 모질게 굴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낯이나 이리저리 주무르며 제멋대로 굴어보겠단 심산이었다. 후유키는 제가 그렇게 행동할 때마다 입술을 살풋 깨문 채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도, 결국 못말린다는 듯이 몸을 맡기곤 했다. 원래부터 기분이 좋은 날이 열 손가락에 꼽듯 했던 하루히는 그런 후유키를 구경하며 놀곤 했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을 하니 조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지금껏 후유키가 올 때까지 잠을 자고, 깨고, 자고, 깨고를 반복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방금 꿈으로 실패했지만. 다음 꿈이 깰 즈음에는 후유키가 돌아와있겠지.
하루히는 다시 눈을 감았다.
*
“하…….”
입김을 따라 투명한 공기가 뿌옇게 갈라졌다. 하루종일 맘에 드는 일이라곤 요만큼도 없었다.
후유키가 해가 다 질 때까지 오질 않았다. 분명 아침 일찍 나갔을 터인 후유키는 오늘 하루종일 뭘 하는지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않았다. 영원히 지속되는 겨울 속에서 해가 지는 시간은 점점 빨라지고만 있었기에 그다지 시간만을 기준으로 하면 그리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후유키의 경우 하루히가 집 앞에서 쓰러져있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한 이후로는 해가 진 후에 집에 오는 일은 그다지 없다시피 했다. 분명히 일찍 오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에 한해서 잠결에 잘못 들었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는 잠귀가 어두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 그 애, 후유키의 목소리는 원래도 조용하고 속삭이듯이 했고, 아침에 어렴풋이 들었던 말은 아마 틀리지 않았을 테다.
그렇다면 늦게 올 일이 있나. 어디에서 또 시답잖은 이들에게 붙들려서 중요하지도 않을 딴짓을 하고 있거나, 몇 개월 조용하다가 갑자기 또 무슨 병이 도져, ‘내게서 도망치겠다’는 생각을 그 머릿속에 우겨넣으며 기도나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 즈음에 하루히는 꿈 속 후유키를 회상했다. 발갛게 부어 젖은 속눈썹. 허공을 바라보는 채 감기지 못한 눈. 허, 여기가 그 ‘샘’도 아니고, 걸어가다가 공격받을 일은 없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머릿속에서 점점 선명해져가는 이미지가 있었다. 새하얀 눈 속에 파묻혀가는 푸르게 질린 손끝같은 것. 찢어진 피부, 그리고 붉음. 호즈노미야도 얌전한 와중에 제 머릿속을 침범하는 붉음이 불쾌했다. 나는 후유키가 겨울에서 죽길 바랐지, 과다출혈로 죽기를 바라진 않아. 제 무의식이 후유키의 죽음을 두려워한다고는 해도—함께 죽고싶다는 생각과는 아마 별개의 기분으로—,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히다니.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하루히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입었다. 충동이었다.
*
오랜만에 나온 집 앞 거리는 조금 미끄러웠다. 눈이 내린 길을 걷는 것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눈은 그치지 않고 내렸지만 밖을 나서기 힘들 정도로 쌓여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세계에서도 제 집 문 앞 정도는 지속적으로 치워주는 사람들이 존재해서겠지, 하고 하루히는 아마 그런 부류였을 후유키를 무심하게 떠올렸다. 무심코 찾았지만 아침에 후유키가 나섰을 터인 발자국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의미 없는 시간 낭비를 했구나, 하고 하루히는 조심조심 앞으로 나섰다. 가로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누군가 또 가로등에 불을 지피는 이들도 아직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눈에 비친 인공조명에 시야가 번쩍번쩍 하는 것이 불편해서 눈을 꾸욱 감았다가 발을 옮겼다.
마을에 도착할 때에는 세상은 온전히 밤이 되어있었다. 하늘은 어두웠고 눈이 쌓인 아래는 하얗게 눈부셨다. 눈이 내리는 밤에 바깥을 나다니는 사람은 당연히 있을리가 없어서, 하루히는 거리를 혼자 온전히 점유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집집마다 불이 켜져있는 곳도 있었고, 꺼져있는 곳도 있었다. 밤에 홀로 거리를 나서본 일이 없었기에 이런 것들은 전부 생소한 감각이었다. 후유키가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거리를 천천히 누비고 다닌 것은 그런 때문이었다. 거리는 고요했다. 집 안에서 들려오는 생활소음 같은 것도 들리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하루히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고갤 들면 저 멀리 십자가가 있었다. 마을 교외에 있는 성당이었다. 언젠가 그랬던가, 내게서 도망치려고 성당까지 간 적이 있다고. 하루히는 추위에 발갛게 트기 시작한 손에 호오, 하고 입김을 불며 생각했다. 성당에 있으려나. 글쎄. 있을지도. 그리 생각하면서도 하루히가 성당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 시가지로 나선 이유는 단순했다. 후유키가 성당에서 수녀가 될 재목으로 스카우트 당해서 납치라도 되지 않은 이상에야 해가 질 때까지 기도나 하고 있을 일은 없었다. 후유키는 보호자 치고는 과도하게 겁이 많았고, 하루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후유키가 기도하는 모습을 한번쯤은 구경하고 싶기도 했다. 자신은 후유키가 홀로 있는 모습을 본 일이 적었다. 만약 그곳에 있다면, 날것의 후유키를 다시 볼 수 있겠지. 하지만 하루히는 은근한 위화감에 겉옷을 습관처럼 여미고, 앞으로 걸었다.
그렇게 하루히는 약국, 잡화점, 망해버린 도서관이나 옷가게, 음식점 따위를 스쳐가며 그곳을 다니는 후유키를 상상했다. 후유키와는 엇갈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성당에 납치라도 된 것인지 만나진 못했지만, 굳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 한 곳. 남은 곳은 빈 공간, 그 무엇도 세워지지 않은 곳이었다.
하루히는 몰아치는 추위에 감각이 둔해짐을 느끼며 멍하니 천천히 걸었다.
*
결국 도착한 곳은 눈이 함뿍 쌓여있는 눈덮인 겨울바다였다. 아무리 한가하고 이타적인 사람이라도 굳이 여기까지 와서 눈을 치워줄 생각은 않았는지, 바닷가 해변은 온통 희뿌연 색을 하고 있었고, 쌓인 눈은 점층적으로 얼어 빙판이 되어 힘주어 밟아도 얼음이 깨지는 바삭거리는 소리가 나며 조금 가라앉을 뿐이었다. 시선을 들면 바다는 반쯤은 얼어 있었고, 거기서 조금 더 시선을 멀리 두면 빙판이 시야에 가득 찼다. 파도가 치는 부분만이 겨우 얼어붙지 않고 애매한 과냉각 액체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해변에는 눈과 물, 얼음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리고 아무도.
그런데도 하루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언제였던가 후유키를 찾으며, 너덜거리는 몸으로도 비적이며 거리를 걷다가 쓰러질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날은 너무 추워서 슬슬 발끝도 시려오고 있었다. 손끝과 발끝이 아리다가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바다가 저 멀리 있는 것마냥 은근하게 파도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일찍 돌아오면 후유키를 괴롭히려고 했는데, 일찍 돌아오지 않았으니 후유키를 이렇게라도 괴롭혀야겠다. 그러게 왜 그렇게 늦었담. 하루히는 멍한 낯으로 피식이며 휘청였다. 폐에 찬 바람이 가득 차서 마른 기침이 터져나왔다. 먹은 약의 약효가 이제야 풀리는 모양이었다. 분명 나는 여기서 조금 더 있으면 쓰러질 테고, 늦어버린 후유키는 아마 정신도 못차리겠지. 그 얼굴이, …,
그 얼굴이.
그 얼굴이…?
눈 앞이 붉었다가 희었다. 형광 도료라도 뿌려놓은 듯이 눈 앞에 불빛이 번뜩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루히는 휘청이다가, 슬로우모션마냥 픽, 눈밭에 쓰러졌다. 파도가 한 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물소리가 귓가에 시끄럽게 회오리쳤다.
*
소설 속에서 사람이 겪는 이야기에는 보통 숨겨진 비밀들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진상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깨닫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고, 보통 소설 속 이야기들에는 차근차근, 하나씩 하나씩, 단계를 밟아 진실을 추리할 수 있는 복선들이 세계에 뿌려져있곤 했다. 주인공이 그 단서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면서, 이 세상에 만재한 위화감을 깨닫고, 눈 앞의 달콤한 거짓과 그 너머의 쓰디쓴 진실을 하나하나 비교 대조해가며 제 인지를 가린 벽을 그 스스로 부숴가는 것이다. 그것이 이런 이야기의 클리셰같은 것이다.
다만, 놀랍게도 하루히는 영민했고, 눈치가 빨랐다.
그에겐 그런 사소하고도 자잘한 절차와 과정 따위는 필요없었다. 아주 작은 복선이면 족했다.
그는 어떤 방아쇠가 당겨진 것처럼, 문득, 한순간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음을.
*
돌아보면, 이상했다.
본 적 있는 성당, 본 적 있는 마을, 그리고 본 적 있는 몇 개의 가게들이 콜라주처럼 이어붙어져있었다. 그 모두가 눈에 파묻혀있었으니 어색하진 않았지만, 호즈노미야 하루히는 이것이 자신이 케이이치의 사택에 가면서, 호그와트에 가면서, 친구들의 집에 들르면서 보았던 거리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하루히는 생각했다. 내가 몇번이라도 더 자주 집 밖을 나다닐만한 상태였다면 이 우스운 짓거리도 한순간에 끝이었겠군.
하루히는 눈밭에서 숨을 느릿하게 내뱉었다. 애초에, 그 꿈도 경고음같은 거였군. 생생하게도 검붉은 후유키가 머릿속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는 아쉬웠다. 아, 여기가 끝이라면, 마지막으로 후유키의 얼굴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줘야 했다. 이게 제 꿈이라면 너무도 비겁했다. 하루히는 멍한 머리로 눈을 감은 채 여기서 함께 지내던 얼마간의 후유키를 더듬으려 했다. 제 뺨을 감싸는 따뜻한 손길, 서투르고 비겁한, 다만 고아하고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 떨리던 목소리, 흰 살결, 검은 머리카락…,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죽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게 너인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을 테니까. 다만 유감스럽게도 끔찍할 정도로 생각이 느렸다. 나리던 눈이 느려지더니 그 자리에서 뚝 멈춰버리고, 파도 역시도 천둥처럼 울리며 다가오던 것이 뚝 멎었다. 분명 눈밭에 누워있는데 온 몸이 적셔들어가는 끔찍한 한기가 돌았다.
하루히는 눈을 뜨고 싶었다. 눈을 뜨면 후유키가 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아, 꿈 속의, 세상을 저주하며 울던 자신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하루히의 마지막 사고였다.
*
하루히는 의식이 돌아온 후에도 눈꺼풀이 얼어붙어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여전히 손발의 감각은 둔해서, 누군가 망치를 들고와서 내려쳐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밀물 탓에 옷가지와 몸이 젖어 온몸이 덜덜 떨리곤 있었으나 수족이 제 맘대로 잘 움직이진 않았다.
겨우 삐그덕거리며 눈을 뜨면 희뿌연 하늘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 이리도 꽁꽁 얼어붙은 몸에도 체온이랄 게 남은 모양인지, 숨을 뱉을 때마다 입김이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 자신은 숨을 쉬고 있었다. 힘겹게 옆을 돌아보면 클레멘트가 있었다. 눈물이나 땀 따위가 얼어붙은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하루히는 깨달았다.
꿈은 끝났으며, 자신만이 여전히 살아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