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돌아가기
6화: 스승의 은혜
* 오랜만에 마주한 저택은 이젠 덩치만 컸지 속은 텅 빈 나무껍질같았다. 불과 몇 해 전, 호즈노미야라는 이름 하나로 일대를 주름잡으며, ‘마을의 어디에서도 그 저택의 시계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평이 자자하던 대저택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드나드는 사람은 물론이고, 저택 마당마저도 제대로 깔끔하게 정리되진 않아 담쟁이덩굴과 잡풀들이 잔뜩 자라나 무성해져, 내가 발을 들여 내는 차가운 날씨에 마른 풀 밟는 소리가 이 차갑고 죽어가는 저택이 내지를 수 있는 유일한 신음 소리인 것마냥 시끄럽고 불쾌했다. 일곱 해 전 떠날 수밖에 없던 저택으로 이제야 발을 들이는 마음은 제법 막막했다. 하지만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지긋지긋한 그 얼굴도, 호즈노미야란 이름도. 스승의 은혜 봄겨울 - 널 증오해. 널,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 … 내가 널, 부디, … … 똑똑똑. 책상이 덜컥이는 소리를 낼 정도로 강하게 몸부림침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일어나니 손바닥에 붙어있던 글씨가 빼곡하던 종이 몇 장이 딸려오다가 바닥으로 팔랑팔랑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나는 꿈결이었고, 그걸 단숨에 받아낼 정도로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다. 오늘도 꿈자리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허리에서 목덜미까지 주우욱 근육이 긴장해있었다. 잠에 절어있던 머리는 궂은 날씨 탓에 더 둔하게 움직였고, 다시 한번 문을 노크하는 똑똑, 소리가 날 때쯤에야 가요, 한마디 가라앉은 목소리로 외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목을 가다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문을 열면, 집배원이 편지 두 장을 건네왔다. 종종 오는 이였기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다가, 발에 걸리적거리는 신문까지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눅눅하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맡아 조금 시원해진 정신으로 방을 쳐다보니 가관이었다. 방이 변변하게 나뉘어있지도 않은 조그마한 방은 방금 일어나다 떨어뜨린 종이들로 바닥이 죄다 가려질 지경이었다. 일을 하다가 잠이 들면 언제나 이 꼴이었다. 이러다가 종종 옆 집 스티엘레 부인이 과일을 나눠주러 오시다가 깜짝 놀라 꾸중을 하시던 일도 있었던가. 배경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곤 글을 조금 읽는 것밖에 없는 여자가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느긋할 수는 없었다. 삯바느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차라리 다행이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떨어져 엉망이된 종이들을 주워 들면 몇 달 전 부임하게 된 부잣집 메이슨 씨 댁 도련님을 위해 정리해두었던 수업 자료였다. 메이슨 씨 댁은 요즘 내가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는 집이었다. 나는 그 집의 어린 도련님-이름은 앤드류인-을 어르고 달래가며 글을 읽고 쓰는 법, 귀족들의 행동예절, 걸음걸이 따위를 가르쳤다. 서글서글한 태도로 대하면서도 공부를 유독 하기 싫어하는 통에 어떻게 흥미를 붙이게 할 지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들이 빼곡했다. 어느정도 머리가 큰 대부분의 아이들은 공립학교에서 무상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도시에는 유독 자녀의 홈스쿨링 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부자들이 늘고 있는 추세였다. 과잉 보호도 있겠고, 학교로 보내기에는 수치스러운 일들이 있었거나,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어차피 부자들의 생각을 이해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혼자 지낸지 7년이고, 부자들의 커뮤니티와는 지금도, 앞으로도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만 이어지게 될 테니까. ‘ 후유키, 네가 어떻게… … ’ ‘ …… 아버지. ’ 찰깍, 하고 볼을 내려치던 소리가 머릿속에서 이어지기 전에 고갤 마구 내저었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 과거를 아무리 회상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신문은 더 읽어봤자 전부 언제나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귀족들의 이야기, 어느 졸부들의 이야기, 서민들에게는 그저 먼 나라의 일로만 느껴지는 일들을 저들만의 단어로 비웃고, 조롱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런 일들에는 이제는 신물이 났다. 끔찍하게만 느껴졌고, 피곤했다. 더는 옛날 일을 들추고 싶지도 않아 널찍한 종이를 갈무리해 책상 위로 다시 올려두고는 편지를 들었다. 날인을 확인하면 한 장은 아무런 날인도 없었지만, 남은 한 장은 메이슨에서 온 것이었다. 레터나이프로 잘 밀봉된 편지를 열어보니, 편지는 제법 짧았다. [ 친애하는 후유키 선생. 내일부터는 오지 않아도 되네. 지금까지는 수고 많았네. 더 좋은 선생이 앤드류에게 오기로 했으니, 그런 걸로 알아주게. 봉급은 나중에 정산하여 보내주는 것으로 하지. ] 깔끔한 글씨와 교양있는 단어. 해고였다. 어린 도련님은 꼭 그 나이 애들처럼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고, 종종 오늘은 수업에 오지 마세요, 같은 우스운 문장이 쓰인 편지를 제 부모님이 보낸 양 거짓으로 지어내어 보내 오곤 했고, 아마 이번에도 그러한 장난이리라 생각하여 짧은 한 페이지 짜리 편지를 몇 번을 읽어도 의미는 변하는 일이 없었다. 이 단정한 글씨는 어린애가 지어낸 편지라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하는 일이 있다니. 혹 무언가 잘못을 했던 적이 있던가, 되짚어보았지만 떠오르는 점은 없었다. 메이슨 씨 댁은 학생인 앤드류 본인을 제외하고서는 나를 좋아하는 축이었다고 생각했다. 뭐, 돈 많은 집 이들이 변덕스러운 것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까지 밤 새 정리해둔 수업 자료를 생각하면 입 안이 썼다. 낭패였다. 생각해보면 제게 갑자기 찾아오는 소식이 길한 소식일리가 없었다. 운명은 지금껏 살면서 제 편이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 기대할 수록 의미없는 일이었다. 빠르게 신문에 광고를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의식은 흘러갔다. 레터나이프는 테이블에 남아있는, 날인조차도 없는 단단히 밀봉된 편지 한 통을 뜯어냈다. 날씨가 춥다느니, 하는 틀에 박힌 편지 서두는 형식적이었다. 딱딱하지만 적당히 예의를 지키는 듯 보였다. 빠르게 글자들을 따라 시선을 내리다보면 한 문장에서 시선이 잠시 멈췄다. [ … 귀하를 가정교사로 초청하고 싶습니다. 보수는 지금 다니는, 아니, 다녔던 곳의 다섯배를 보장합니다. ] ‘ 내가 언제 잘릴 지 아주 예언이라도 하셨던 모양이군. ’ 인생사 어찌 흘러갈지는 한치 앞도 모른다고 했건만, 이 이름모를 사람은 내가 해고를 오늘 당할지는 어찌 알고 이렇게 편지까지 보내셨을지. 신경질적으로 튀는 사고들에 순간 가슴이 섬짓했다. 이런 화풀이가 대체 무슨 의미겠나 싶었어 마음을 가라앉히려 느릿하고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다섯배. 내가 다녔던 곳의 다섯배를 주면서까지 내게 가정교사를 맡기려고 하는 걸 보면 제법 급한 모양이었다. 맡아야 하는 아이가 아주 대단한 골칫덩이라던가, 아니면 집이 아주 멀리에 있다던가. 이만한 금액을 얼굴도 모르고, 유명하지도 않은 일개 가정교사에게 선뜻 내놓을 정도의 이유는 있을 것이었다. 홀로 살게 되면서 깨달은 가장 큰 교훈이었다. 이유없이 미워할 수는 있어도, 이유없이 선의를 바랄 수는 없다고. 적어도 타인에게는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이유없는 기회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게, 오라고 해놓고서는 주소도 제대로 적혀있지 않군. 이름도 제대로 적혀있지 않고….’ 편지지를 무심코 휙 뒤집었다. 주소가 적혀있었다. - 아. 나는 그 주소를 알고 있었다. 이 일대에 사는 그 누구라도 아마 그 집에 누가 사는지 알고 있겠지. 일대에서 가장 큰 저택.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킨 일가가 살았던. 그 주변을 걷는 것만으로도 은은한 시계소리가 울려퍼지는 고귀한 저택이었던. 이 7년동안 죽어라 잊으려고 발버둥쳤던. 나의 집이었던. 나의 가족이었던. “ 호즈노미야……. ” 그 이름을 입으로 내뱉은 순간, 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환한 녹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누나, 하고 부르던, 언뜻 미소처럼 보이던 얼굴. 제 옷자락을 잡고, 손가락을 얽어오던 나의 쌍둥이 남동생. … 우리를 보고 터져나오던 비명 소리와, 쏟아지던 시선들 탓에 보이지 않던 그 애의 표정까지. ‘ 하루히! ’ 언성까지 높여가며 했던 모든 말들은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 가족들에게는 물론. 심지어 그 애에게도. 그 애는 모든 의혹 사이에서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 길로 쫓겨났다. 가족도, 이름도 잃은 채로. 그 이후로 7년이었다. 나는 어른이 되었다. 글을 읽을 줄 알고, 그나마 영민한 축에 속했기에 빠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혼자서, 그 누구도 곁에 두지 못한 채 어른이 되는 동안, 똑같이 어른이 되었을 그 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려지지 않기에 포기했다. 의미 없는 일이었다. 생각할 수록 더더욱 의미없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없었고, 이미 그러기에도 늦었다. 억울함을 토로하고 힐난하고 비난하기에는, 이미 호즈노미야는. 상념을 거두고 정신을 차리니 제 목 언저리에서 심장이 둥, 둥,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런 해고와 잊고 있던 이름이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의식 저 아래에 잠겨있던 울분이 가슴을 울컥울컥 치고 올라왔다. 심호흡을 옅게 한 다음,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 접어두었던 신문을 펼쳤다. 진부한 귀족들의 이야기라도 보아야 과거의 일에 덜 얽매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신문에 그득하니 적혀있는 ‘유령 저택’에 대한 이야기가 신경에 거슬렸다. 사람들은 어찌 이렇게도 타인의 몰락을 달콤하게 여기는지. 나의 부모님의 죽음을 필두로 이어진 호즈노미야의 몰락은 벌써 몇 달 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려 안주거리가 된지 오래였다. 내외가 동시에 사망하여 한순간에 몰락하여 과거의 명성과 부따위가 폭삭 가라앉았으며, 사용인은 다 떠난지 오래인 비극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들이 또 신문의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집주인의 사망 원인은 병세의 악화가 아닌 살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여… 유령 저택에 남은 호즈노미야의 마지막 남은 직계 혈족은 저택의 바깥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지 오래되어, 아직 비보에서 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병세의 악화. 살인. 비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들의 유일한 아들인 어린 청년. 그 애가 슬픔에 눈물이라도 몇 방울 흘렸을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사람의 죽음과 인간의 몰락, 비극에 몰려들어 작은 한 몸을 물어뜯지 못해 안달인 기자들도, 이 얼마나 우습지도 않은 촌극들인지. 신문지를 대강 구겨 테이블 위로 던졌다. 구역질 나기 짝이 없었다. 신문 탓에 편지들이 팔락거리며 허공을 잠시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잠시만. 그렇다면 왜 그에게 가정교사가 필요하지? ” 내 나이가 스물이니 그 애도 결코 가정교사가 필요할 나이는 아닐 터였다. 스물은 가정교사의 가르침 아래에 예절교육을 받을 나이는 아니었으니.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 집에 다른 어린아이는 없다. 호즈노미야에 어린애가 생겼다면 신문에서 내내 떠들어댔을 테고, 적어도 몇 년 전부터는 어린애가 생길 수 없는 저택이 되었을 터였다. 시선이 기사 문단들을 꾹 꾹 내리누르며 느리게 이어졌다. 그래, 사실 큰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가정교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내게 편지를 보냈을 거란 생각은 너무 안일한 종류의 것이다. 그 호즈노미야 하루히라면 분명 더 좋은 교사를 데려오는 것도 가능했을 테고, 고르고 골라 나를 부를 필요는 결코 없었을 테다. 그렇다면 분명 일전에 가정교사로 일하다, 호즈노미야에서 쫓겨나온 다음에도 가정교사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와 나는 이미 나눌 이야기가 없으니, 굳이 갈 필요는 없을 테다…. - 이어지는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짐을 싸기 시작했다. 호즈노미야에 남은 유일한 혈족이 나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제법 뻔했는데도, 결론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내가 사는 곳을 안다는 것 자체로도 나는 이 모든 생각들이 반복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싫었다. 나는 호즈노미야의 이름을 본 순간 불쾌했고, 불편했으므로, 이런 편지가 다시 오진 않길 바랐다. 기실, 그 모든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피가 이어진 부모님의 죽음 이후로도 얼굴을 한번도 비추지 못한 죄책감 따위도 어딘가에는 줄곧 있었던 모양인지 가슴을 쿡 쿡 찔러왔다. 그래, 과거와의 청산은 언젠가 결국 마주해야할 일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매듭을 짓고,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게 해달라는 정도의 부탁은 나도 할 자격이 있을 테다. 복잡한 생각과는 정반대로 거리는 평화로웠다. 아이들이 꺄르르 웃어젖히며 거리를 뛰어다니고 있었으며, 그의 부모 되는 이들인지가 거리에서 서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들은 금방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아, 선생. 외출하는 모양이죠. 아, 예.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아요. 조심히 다녀와요. 초봄이라도 날은 추우니까. 내 쪽을 바라보며 푸근한 미소를 짓던 부인이 옆 사람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 그러고보니 이제 그 집에 딱 하나 남은 아들이 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한다지…. 그만큼 호사를 누리던 집안이 그렇게 말할 줄은 알았겠나…. 받아치는 것들이 새삼 익숙한 이야기들이었다. 유령 저택. 알 수 없는 일들로 하루아침에 회복할 수 없이 망해버린 귀족가. 아픈 아들. 호즈노미야였다. “왜, 그 집 쌍둥이 딸아이가 있지 않았던가. 그 때부터, ….” “ 딸아이는 신문에는 언급도 없던데. ” “가족들이 죽었을 때 같이 죽었을지도 모르지. 안타까운 일이야, 쯔쯔….” 그 즈음이 되자 속이 불편하여 견딜 수 없어졌기에, 눈을 꾹 감고는 몸을 휙, 돌려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버렸다. 그 호즈노미야였던 사람이 지금 당신들 앞에 있는 줄은 이들도 전혀 모르겠지. 사실, 그런 이야기를 몇 번을 들어도 아무런 감정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멀쩡한 날이 있는가 하면 비슷한 이야기를 보기만 해도 해묵은 억울함이 밀려와 날이 설 때가 있다. 마치, 그 날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니 ‘그 집의 몸이 약한 아들이 오늘 내일 한다’는 이야기에 우습게도 자꾸 온 신경이 집중되는 이유는, 호즈노미야 후유키가 아니라 ‘하루히의 누나’로써, 쌍둥이 동생을 줄곧 걱정하던 시절이 몸에 밴 탓이다. 분명 그 때문일 터였다. * “돌볼 사람도 없는 집, 전부 팔아치워버리면 좋았으련만.” 마지막으로 발걸음했던 수 년 전, 흐릿한 기억에 의존하여 찾아가면, 전혀 관리 되지 않아 녹이 슨 주물대문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문짝 하나가 일반 가정집의 마당만한 크기 탓에 특유의 웅장함은 저버리지 않았으나, 희끗희끗 그을린 흔적이 낭자하여 지금은 그저 볼품없는 쇳덩이일 뿐이다. 나는 이 집에서 살 때도 이런 큰 대문은 필요 없다 생각하던 축의 사람이었지만, 지금에 이르러 이런 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과거의 부와 명예를 알려주는 지표로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어 안쓰러워 보이고 있단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거대한 주물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잠금 하나 되어있지 않았다. 꼭 폐허처럼. 저택 앞으로 걷는 동안에도 나는 그 누구의 그림자도 확인할 수 없었다. 정원사는 물론이고 경비원, 흔한 길고양이마저도 나다니지 않는 서늘한 부지를 느릿하게 걸었다. 내 발걸음 소리가 이 을씨년스러운 저택에서, 유일하게 산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리일 것 같아서 봄바람에도 소름이 끼쳤다. 분명 과거에는 이 곳을 걸으면 연못에서 물레방아가 돌아가곤 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푸르르고, 은은한 나무 향내가 마당에 퍼져있는 것이 제법 운치있는 곳이었다. 다만, 물레방아는 멈췄고 연못은 말라버렸으며, 나무는 이미 죽어 담쟁이덩굴만이 그를 둘둘 감은 채 위로 올라가 빛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내지르고 있었다. 봄비가 내릴 법한 계절인데도 눈에 닿는 모든 나무들이 앙상하게 빛을 잃은 꼴을 보면, 유령 저택이란 이름 그대로였다. 꼭 이 곳만이 외딴 세상에 홀로 뚝 떨어져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것 마냥. “이 곳만 공기도 어쩐지 조금 더 차가운 듯 하고….” 꼭 이 저택의 모양새처럼 저 안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다른 이에 대한 생각은 억지로 머릿속 한 켠에 접어두자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몸을 잠깐 움츠렸다. 감기가 걸렸을 일은 없으니, 아마 이 부지에만 도는 묘한 냉기 탓인 듯 싶은데, 소름끼치는 이 집에 제 발로 다시 찾아봐버린 것이 바보같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낮게 웃음짓기만 했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걷다보면, 그제서야 저택의 입구가 보였다. 익숙하고도 서늘한 꽃향기가 훅 끼쳤다. 서늘한 꽃향기라는 단어처럼 어색한 단어의 조합이랄 게 있을까. 다만, 그리 낯설진 않았다. 나는 이 저택을 오랜 시간 지켜온 그 나무를 알고 있었다. 봄날이 되면 짙은 꽃향기를 풍기던. 고갤 돌리면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꽃나무가 홀로 푸릇하게 서 있었다. ‘누나, 머리가 아파.’ ‘그러니? 그럼 창문을 닫아두는 게 좋을까?’ ‘됐어. 그냥 쉴래. 꽃향기가 날 자꾸 거슬리게 해서 책을 더 읽고싶지 않아.’ ‘그럼 책은 안 읽어도 되니까, 내가 하는 이야기만 들어도 좋겠구나.’ ‘하….’ 아카시아. 그래. 하루히의 방 창문 바로 앞에 심어져있던 이 나무는 아카시아였다. 꽃부터 열매까지 버릴 것 하나 없는 나무라며 그 애에게 알려줬을 때 시큰둥한 낯으로도 고갤 몇 번 주억거렸던 것이 기억에 스쳤다. 머리가 아무심코 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서 물끄러미 시선을 들어 가까이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다가도, 어깰 으쓱였다. 눈에 닿으면 뭐 어쩔 테고, 안 닿으면 어쩔 텐가. 이젠 전부 의미 없는 일일 테지. 다시 시선을 돌리면 굳게 닫힌 현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유롭게 드나들던 과거와는 이 집과 나의 관계가 달라진지 오래 지났다는 것 정도는 알고있는데도, 눈 앞에 굳게 닫혀있는 문이라는 것은 제법 긴장되는 구석이 있었기에 그 현관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노크를 해도 멀리 있는 이들에게 들릴 정도로 작은 저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멋대로 문고리를 당겨 열어볼 정도의 무뢰배도 아니었거니와,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길지 않게 벨을 꾹 눌렀다. 문이 열리는 때까지는 잠시의 기다림이 있었다. “도련님…, 아니, 주인님께서 말씀하셨던 선생님이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 기억이 있는 중년의 사용인 한 명이 열린 문 사이로 내게 몸을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아가씨라 불릴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애시당초 나는 이 집 사람이 이젠 아니니 손님으로 대접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나의 이전 모습을 알 법한 이가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은 생각보다 묘한 기분이었기에 마주 인사하기 전까지 나는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도련님, 주인님. 그런 단어와 어울릴 이를 되새겨보고 있자니, 하녀장은 내게 응접실로 모시겠다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깍듯하게 날 안내했다. 집안은 마당만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덜했다. 하녀장의 최소한의 손길이 닿았던 탓인지, 텅 비어 한산한 것이 서늘한 느낌을 줄 뿐, 정갈하단 이미지가 강했다. 저택의 구조는 당연하다시피 모두 기억하고 있었고, 하녀장 역시도 내게 저택을 굳이 안내해주려는 기색은 없어보였다. 하녀장은 내 앞을 사뿐사뿐 걸어 저택 입구의 왼편에 위치한 응접실로 향했다. 나는 그 뒤를 천천히 따르며 저택 안을 시선으로만 죽 훑다가, 그만두었다. 향수를 느낄 시점이 아니었고, 이 곳에 대해서 더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착각해서는 안 됐다. 고개를 일부러 정면으로 고정시켰다. ‘그나저나,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네.’ 한산하다못해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큰 저택에 나와 하녀장 둘만이 존재한다는 기분 탓이었다. 가정교사를 불렀으니, 다 큰 애가 내게 수업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린애는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하녀장은 내 의아해 하는 기색을 알아챈 모양인지, 몸을 돌려 내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나는 굳이 주변을 둘러보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하녀장은 내가 질문을 굳이 하기 전에 대답했다. 지금 저택에 계시는 것은 주인님 한 분 뿐이십니다. 잠시 대답을 않자 하녀장 역시도 다시 몸을 돌려 몇 걸음 앞으로 걸었다. “그렇다면 이 댁 주인께서 사람을 잘못 부르신 것일 텐데요. 저는 가정교사라서.” “선생님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여러번 말씀하셨거든요.” “예?” 도련님께서는 선생님께 아주 관심이 많으십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저택을 나가신지 벌써 몇 년이나 흘렀는데도요.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무심한 말투로 공손하게 이어나가는 문장은 지금껏 생각했던 일도, 들었던 일도 없었던 일이라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당황했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나를 그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쫓아내놓고, 몇 남지 않은 사용인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었던 건지. 해봤자 뭐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했을지도. 잘 쳐줘도 홀로 남은 도련님의 변덕일 테고, 아니라면 나에 대한 험담이었을 테다. 제 쌍둥이 누나가 집안에서 수치스럽게 이름까지 지워지며 쫓겨났다는 식의.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직접 말씀을 나눠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 … 한결같으시군요.” 내가 입을 다물어버린 채 조용해지자, 하녀장 역시 더 할 말은 없다는 듯 발소리를 죽여 복도를 걷다가, 큰 문 하나를 열어 나를 들여보냈다. 나는 이 집에서는 손님 취급이었고, 손님을 들이는 방이랄 건 당연히도 응접실이었다. 특유의 화려함을 잃지 않은 방에는 낮인데도 햇빛이 들지 않아 쓸쓸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내가 티테이블 앞에 앉는 것을 본 후에야 주인님을 모셔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차분히 몸을 물린 하녀장에게 머쓱한 기분으로 고갤 느릿하게 끄덕이자, 이내 큰 응접실에는 나만 남게 되었다.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줄곧 차를 새로 데우며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테이블 위에 있는 찻주전자에는 흰 꽃잎이 뜬 채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앉은 쪽에 있는 찻잔에는 반쯤 찻물이 담겨있었다. 아카시아 꽃차였다. 아마 아까 보았던 거대한 나무에서 따온 꽃이리라. 따뜻한 훈기가 끼친 탓인지, 은은한 차의 색감 때문인지. 멍하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속으로 따뜻하게 넘어가는 느낌에 표정이 슬 풀어지려던 것을 다시 가다듬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맑은 찻물이 언뜻 희부옇게 탁해지는 것도 모른 채. * 정오를 막 넘겼는데도 방 안으로 햇볕이 들지 않아 칙칙한 창문을 만지작 거리기도 하고, 망해버렸다고 하기에는 쓸데 없이 두껍고 잘 정돈된 가죽 소파에 앉아보기도 할 즈음에서야 응접실 너머 복도 끝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지 않아, 텅 빈 유령 저택에서 구두를 신을 이는 단 하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무심코 고갤 들었다. 길쭉해진 몸, 특유의 권태로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소파에 걸터앉아 턱을 괸 채로 입가를 문지르는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선명하게 밝은 초록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칠 즈음, 흠칫 놀라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랜만이네, 선생님. 보고 싶었어.”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모습. 앳된 청년, 어른이 된 아이, 가슴을 쥐는 이 끔찍한 애틋함. 호즈노미야 하루히. 그 애였다. 너는 더이상 호즈노미야가 아닌데, 누나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나직하게 듣기 좋은 목소리와 함께 여유롭게 마주쳐오는 시선에,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네가 어떻게, 감히? 후유키, 네가 어떻게 동생에게 그럴 수 있느냐…! 어디선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팽팽하게 이성의 끝을 붙들어 유지시키고 있던 가슴 속 평정에 자갈돌을 던진 것마냥 자꾸 파란이 일었다. 지금껏 묻어둔 채로 버텨왔던 증오와 배신감이 자꾸 고갤 들고 있었다. 어떻게 그따위 수치스러운 죄목의 주홍글씨를 내게 새겨놓은 채로 버려놓고서, 보고 싶었다는 말을 내 앞에서 저리 뻔뻔하게 내뱉을 수 있을지. 조롱임이 명백할 이 만남 앞에서,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지 않으려 나는 필사적이었다. 그 앞에서 수치스럽다는 감상을 떠올리는 것마저도 치욕스러웠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루히는 턱을 괸 채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가늘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편지를 봤을 텐데도 그런 표정이네. 내 가정교사로 있어줄 사람이 며칠간 필요해서 말야. 어릴 적처럼 네가 그래주면 좋겠다 싶어서. 나긋나긋 여유롭게 내뱉는 문장에는 치가 떨렸으나 평정심을 가까스로 유지했다. 품에 넣어두었던 편지를 꺼내 앞으로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하루히는 낮게 마른 기침을 몇 번 하면서도 바닥에 떨어진 편지에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 나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제안에 거절하러 온 겁니다. 이런 편지가 오는 건 마지막이었음 좋겠군요.” “그러지 말고 조건이나 들어보는 게 어때?.” “왜, 또 곁에 두다가 심심하면 우습지도 않은 이유로 날 내치려고?” “꽤 상처받았었나봐.” 무슨 의미이든 그때의 일들은 결코 대답하고 싶은 질문은 아니었기에 입을 꾹 다물면, 하루히는 뒤에 서 있는 하녀장에게 손짓해 티테이블에 준비된 차를 내오게 하고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기간은 5일, 매일 아침 신문을 읽어주고, 차를 내오고, 하루에 한 번씩 내가 부탁하는 요구만 들어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야. 꽃이나 물건을 구해다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가능하잖아. “그리고, 점심과 저녁 식사 상대가 되어줘야해. 그 외에 바라는 것은 없어.” 그건, 가정교사가 아니라 심부름꾼을 바라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려다가도 들어갔다. 대체 무슨 생각인 일인지, 거절도 할 명분이 없고, 수락하기엔 불쾌하여 원한다면 편지에 적힌 것보다 더 보수를 얹어주겠다는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면, 하루히는 간헐적으로 기침을 이어나가면서도 하녀장이 따라준 찻잔을 둥글게 몇 번 돌려보며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동안 생각에 잠겼다. 의미없는 증오 따위로 지킬 자존심 따위는 이미 내게는 사라진지 오래다. 내 명예는 땅에 떨어졌으며, 지켜야 할 덕목들조차도 지금의 내게는 없다. 메이슨 가의 변덕으로인해 아쉬워진 사정을, 이 닷새만 참으면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그 기간이 지난 이후로는 날 부르지 않을 거라면. 고갤 끄덕이는 데에는 조금의 각오가 필요했지만, 하루히는 내 대답이 즐겁다는 듯 굴 뿐이었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5일 후에는 다른 사용인이 올 거야. 입에는 대지도 않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그 때 쯤, 나는 하루히의 낯빛이 꽤 창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내일 한다는 것은 과장이겠지만, 오랫동안 저택 밖으로 나다니지 않은 것 정도는 사실이겠구나, 싶었다. 마음이 쓰이는 것은 그저 측은지심이다. 내 앞에 있는 이가 세상에 하나 남은 피붙이라는 사실을 제하고서라도, 눈 앞에 환자가 있어서 마음 편할 이는 없고 나도 꼭 그 정도로만 불편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은 모양인데, 바깥이라도 다니지 그러니.” “왜, 걱정돼?” 그저 놀리기 위함이었던 건지, 내가 무어라 쏘아붙이기 전에 하루히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을 안내해주겠단 말과 함께. 응접실에서 나서기 전,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선을 긋기 위한 것들. 이미 지나간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것, 또한…. “‘도련님’, 이렇게 부르면 되겠지.” 하루히, 하녀장이 열어주는 문을 가만히 빗겨보다가도, 그는 대답했다. 하루히가 좋아. 그는 내가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도 허락지 않을 셈인 것 같았다. 문 옆에 선 그를 스쳐지나가며 응접실을 나섰다. 계단으로 걸어가는 동안 바라본 저택은 조용했고 어두웠으나 창문마다 커튼이 짙게 쳐져있었다. 그 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는 봄날의 빛이 복도를 비추고, 고풍스럽고 은은하게 번쩍이는 저택은 내가 이곳에 지내던 때와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루히는 내 앞으로 걸어나가며 이 곳에서 머무는 동안 필요한 것은 하녀장에게 부탁하면 되며, 저택의 어디든 편하게 다녀도 좋다고 일러주었다. 집안이 낯설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애당초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런 내게는 시선을 두지 않은 채로, 하루히는 경고하듯 속삭였다. “단, 내 방과 2층 서쪽 끝에 판자로 막아둔 방에는 절대 들어가지 마.” 계단을 오르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더 잇지 않았다. - “오랜만에 돌아온 이 곳에서 위로받도록 해.”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휙, 고갤 들어 하루히를 흘겨보면, 그는 왜, 하고 묻듯이 나와 시선을 마주쳐왔다. 왜 이 방을 내주었을지 머리로는 모르는 것도 아니나, 사사건건 속에서 울분이 차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층으로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던 것이, 내가 이전에 쓰던 방 앞에 하루히가 섰을 때에는 조금 아득해졌다. 쓰던 가구며, 배치되어있는 구조 자체는 그대로지만, 내가 올 줄을 알고 준비해둔 모양인지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방은 여전히 칙칙하고 서늘했지만,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햇볕은 아까의 응접실이나 지나온 복도보다는 퍽 밝았다. 그러고보면 다른 방에 비해 내 방이 채광이 잘 들던 곳이긴 했던가. 허나 그게 전부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 방의 가구들이 고급품이든, 이 집의 음식들이 아무리 진수성찬이든. 이 곳을 나올 때의 나는 죄인이었고, 지금의 나와는 결코 연이 없는 일들인데. “내 방은 어디에 있는 줄 알지?” 모를리가. 잊었을리가 없지만 굳이 대답하진 않았다. 하루히는 그런 나를 보며 선뜻 웃으며 바로 옆에 있는 방이라며 일러주었다. 언제라도 아픈 동생에게 달려갈 수 있도록 옆방을 자처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부모님은 어린 아들이 주치의보다는 내 말을 더 잘 듣는다며 알겠다며 선뜻 방을 내어주었지만, 종국에 다다라서는 내 뜻은 곡해되어 바닥에 내팽개쳐졌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 하루히는 편히 쉬라는 말을 짧게 내뱉고는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적막이 밀려들었다. 파도에 잠기듯이 묵직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서는 아까의 진중한 목소리가 가득했다. 오랜만이네, 선생님.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하, 보고싶었다니. 당치도 않는 소리였다.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순한 눈이나 창백한 낯빛을 자세히 보았다가는, 같잖은 동정심에 취해 또 마음을 썼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이제 와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마저도 소름끼쳤다. 다정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전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다. 그러면서도 위로 따위의 말을 내뱉고 있던 것이다. 분노와 원망이라는 것은 그 오랜 세월 잠들어있다가도, 눈 뜬 순간 어찌나 불꽃처럼 내 심장 한 켠을 불사르는지. 채 풀지도 못한 짐가방을 들고 이 저택을 나서려다가도 그만두었다. 최악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지…. 그제야 힘이 쭉 빠져 가방을 바닥에 툭 떨어뜨린 채 비틀비틀 침대쪽으로 걸어와 걸터앉았다. 푹신하게 시트가 꺼지는 것이 퍽 낯설었다. 더 이상은 저택의 아가씨가 아닌, 일개 닷새짜리 사용인으로 고용된 내가 이 위에서 잠을 청하기에는 황송할 정도로 푹신하고 사치스러운, 넓은 침대가 하얗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갤 돌리면, 침대 아래에서 낡고 빛바랜 쪽지 하나가 툭, 발에 걸렸다. 반으로 두 번 접힌 종이는, 누렇게 뜬 채로 버스럭거렸다. 무심코 집어들어 펼치면, [ 네가 이 집에 있는 걸 견딜 수가 없어 ] 익숙한 필체였다. 내 동생은 퍽 나를 잘 따르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이런 쪽지들을 이리저리 숨겨놓고는 했다. 집에서 나가라니. 내가 그 집에 있었던 게 대체 누구 때문인데.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 건지. 사실 내가 잘못을 하긴 했던 건지. 나를 잘 따랐던 적이 있는지. 이내 종이는 손아귀 안에서 힘없이 바스라졌다. 언제는 내가 고민해서 그 애의 의중을 알아챈 적이 있었던가. 그랬다면 지금 이런 기분이진 않았을 테다. 이래놓고는 보고싶었다니. 이게 변덕이 아니면 무엇이겠어. 마음을 쓰는 것조차도 낭비겠지. 고갤 몇 번 내젓고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백지 두 장만 놓여있는 커피 테이블이나, 예전의 내가 사용했지만 이미 잉크따윈 다 메말라버린지 오래인 만년필과 하루히가 사용했을 타이, 그 외 교과서나 책 몇 권들이 꽂혀있는 책상을 살피다보면, 등줄기에 옅은 오한이 들어 창문을 닫았다. 방은 그 정도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카시아 나무가 눈에 띄었다. 일전에 이 곳에 있었을 때에도 이렇게 컸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이 집은 내가 갔을 적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진 건 이 집에 살던 이들 뿐인 것이다. ‘사람들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 아쉬워하기에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어, 후유키.’ ‘하지만.’ ‘언젠가는 이 집에도 생기가 돌던 시절이 있었는데.’ 사라져버린 가족들과 망가져버린 관계. 죽음이 감도는 저택. 이젠 외부인이 되어버린 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가 까무룩 잠에 들었다. * 하루히, …, 이래서는, …. …누나, 그런 말은, …. …. 똑똑. 간결한 노크소리.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서 눈을 퍼뜩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상황은 어제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천장이 묘하게 낯설다는 점이겠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눈두덩을 꾸욱 누르고 있자니 창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일찍 잔 것 치고는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뜬 모양이었다. 어깨에서 슬핏 내려간 네글리제를 끌어올리며 몸을 일으키려니 하녀장이 가볍게 아침인사를 건네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후유키 선생님. 어색하게 마주 인사하는 나를 무감하게 바라보던 하녀장은 커튼을 활짝 젖혀 묶어 정돈하고는 협탁 위에 신문을 올려두고는 방을 나섰다. 이 집의 유일한 사용인은 언제나 바쁘겠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헛웃음을 쳤다. 정확히는 이 닷새동안은 유이한 사용인이겠군, 싶어서. “도련님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방을 나서기 전에 내게 일러주는 말에는 네, 하면서도 인상을 푹 찌푸렸다. 갈아입을 옷을 챙기려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호즈노미야 하루히가 내게 닷새동안 요구한 것은 아침마다 신문을 읽어주는 것과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 그리고는 그가 부를 때, 그가 요구하는 심부름을 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 신문을 읽어주러 가라는 소리겠지. 원래는 일찍 일어나더라도 늑장을 부렸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으면서 부지런해진 건지 무언지, 벌써 일어나있던 모양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틀어올리며 준비하면서도 눈길은 신문에 흘렀다. 이른 아침이니 발행된지 얼마 되지 않은 최신호일 것이다. 그래봤자 별 볼 일 없는 스캔들이나 찌라시들이 많겠지만, 흥미로워보이는 칼럼들도 몇몇 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문득, 시선을 잡아끄는 기사가 있었다. [A시 변두리에서 시신 무더기 발견, 몇 해 전의 단체실종사건의 피해자들인가…. (중략) … 시신들은 대부분 백골화 되거나 썩어 있어 사후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을 것으로 추측되며, 수사 당국은 부패의 진행 속도가 비교적 느린 시신의 경우 마치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다는 A시 경찰서 측의 조사결과에 따라 연쇄살인에 초점을 두고 수사를 이어나갈 예정이며, … (후략) ] 언제나 보던 것 같은 가십들만이 가득한 지리멸렬한 기사들 사이에서 유독 강렬한 내용이었다. 매번 읽었던 내용보다는 이런 기사 쪽이 괜찮겠지. 사실,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싹하고 잔인하다고 해도, 작은 화풀이 정도로 이런 건 괜찮지 않은가. 꺼림칙해한다면 그걸로 성공일지도 모르지. 단장을 끝내고, 신문을 든 채 서재의 문에 노크를 두 번 하면, 안 쪽에서 피곤에 절은 목소리가 옅게 흘러나왔다. 들어와도 좋아. 문을 열자마자 서재 안에서 묘하게 피곤하고, 수척해 보이는 인상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하루히는 시선을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관자놀이를 누르면서도 표정이 슬 순해지는 것이 우스워 눈살을 살풋 찌푸렸다. “좋은 아침은, 아닌 모양이로군요.” “다시 말투가 딱딱해졌네.” “지금은 고용인과 사용인 사이니까요.” “내가 허락한다는데 무슨 상관이람.” 짧은 한숨과 함께 내 경어에 불만을 표하던 그는, 실랑이를 할 생각은 없는지 말을 더 잇지는 않은 채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턱으로 가져가 괴고서는 고갤 까닥였다. 신문을 읽어보라는 듯. 시신들에 대한 내용부터 익숙한 가십들까지, 신문 내용을 옆에서 읊어주자 그는 한참이고 말이 없었다.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그저 멍하니 허공 만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는 모습에 고갤 기울이면, 창백한 낯으로 그제서야 손을 들어 가볍게 내저었다. 이제 됐어. 나가봐도 좋아. “......” “......” 아, 맹세컨대 이것은 실책이다.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려고 했을 때, 그 칼라를 옥죄고 있는 타이가 흐트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습관이란 게 무서워서, 신경이 쓰인다는 생각을 할 즈음에는 나는 이미 그 타이에 손을 대어버린 이후였다. 오묘한 시선이 내 손에서 팔을 따라 얼굴까지 콕 콕 박히는 것을 느꼈다. 그 눈길을 마주할 수 없어 타이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팔을 거뒀다. 이유없이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얼마간의 침묵이 지난 후, 하루히는 내게 인사했다. 선생님. 점심때 봐. 나가보아도 좋다는 사인이었을 그 목소리를 듣고 나는 도망치듯이 서재를 나서 문 앞에서 양 손에 고갤 묻었다. 그 애는 아마 나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대체 어떻게 봤겠는가. 그리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봐놓고 이런 것도 두고보지 못하는 바보같은 이로나 알았을 테지. 아, 최악이었다. 그가 나를 조롱할 빌미를 스스로 내놓은 내 한심함이 수치스러웠다. 나는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 그 자리에서 한참을 끙끙 앓다가도, 결국 집안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하루히는 내게 점심 때 보자고 했다. 그렇다고 점심까지 방 안에서 멍하니 눈만 끔벅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좀 움직여야겠어. 무료한 시간은 우울의 지름길이었다. 무엇이라도 해야했다. 어제와 별 다를바 없는 응접실을 지나, 창고로 향하면 먼지 쌓인 내와 곰팡이 썩은내가 물씬 풍겼다. 제법 오래 방치되었던 모양이었다. 한걸음 내딛기만 해도 카펫에 쌓인 먼지가 훅 끼쳐 낮게 기침했다. 말라빠진 장작더미들을 지나,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된 선반에서는 사다리를, 공구상자에서는 원예용 마체테나 망치, 톱 따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몸을 돌려 창고에서 나서려고 했는데, ‘음?’ 장작더미에서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쇠붙이 같은, 날카로운 반짝임. 무심코 몸을 굽혀 팔을 뻗자, 쌓인 것을 잘못 건드린 모양인지 장작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덮쳐오는 장작들에 비명을 지를 수도 없어 이를 꽉 깨물어 신음을 참았다. 카펫에 주저앉으면 먼지가 뿌옇게 솟아올랐고, 이리저리 부딪친 묵직한 장작들 탓에 다리가 욱신거렸다. 쏟아진 장작에 깔린 다리를 빼면서 저 멀리 떨어진 쇠붙이를 발 끝으로 톡 쳐서 이 쪽으로 가져왔다. 생각보다 크기와 무게가 제법 되었다. 휙 고갤 돌려 창고 문을 쳐다봐도, 누군가 들어오는 기색은 없었다. 도둑고양이처럼 집을 이리저리 살피고 다니는 기분이라 가슴께가 쿡쿡 찔렸다. 이 모습을 하녀장이 발견했을 때의 곤란함은 아마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쏟아진 장작들을 다시 쌓아둔 이후에야 발끝으로 걷어낸 쇠붙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단도잖아.’ 그것도 날이 잘 벼러진 채로 이곳저곳에 검붉은 것이 눌러붙어있는 단도. 짐승을 죽인 날인지, 사람을 죽인 날인지는 모르나, 손잡이 부분에 아름다운 문양들이 음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제법 가치있는 물건이었을 테다. 손잡을 잡고 자세히 살필 새도 없이 날의 핏자국이 채 굳지 않아 내 손에 조금쯤 묻어있었다. 묻은지 얼마 되지 않은 피. 창고의 장작 뒤에 숨겨져있던 것. 누군가(이 집에 있었을 누군가는 단 둘뿐이겠지만,)가 의도적으로 숨긴 건가 싶어 소름이 쫙 끼쳤다. “선생님.” 하녀장이 부르는 목소리에 단도를 떨어뜨릴 뻔 했다. 급하게 다시 쌓아둔 장작 위에 단도를 올려놓고서 치맛자락을 툭툭 털어내면 하녀장은 무심하게 내게 다가왔다. 식시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장작을 쌓아두는 데에 시간이 제법 걸렸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카펫 위에 굴러 흐트러진 채인 내 행색을 보고 넌지시 묻는 하녀장에게 죄송합니다, 하며 인사를 했다. 그는 천덕꾸러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내게 향하다가, 이 곳은 정리를 해두지 않는 창고니 먼지가 많습니다. 하며 먼저 방을 나섰다. 제법 민망한 일이다 싶었다. 속없는 여자로 보이려나. 어딜 돌아다니든 전부 집주인에게 직접 허락 받은 일이긴 했으니, 무어라 변명을 덧붙이진 않은 채로 치맛자락을 두어 번 털고서 그를 따라갔다. - “와서 앉아.” 식당에 들어서면 하루히가 이미 상석에 앉아있었다. 피곤한 낯빛은 그대로인 채였다. 좀 늦게 온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데. 굳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원래 시간 약속을 잘 어길 정도로 게으른 아이는 아니었다지만, 일찍 일어나거나, 약속보다 일찍 나와서 나를 기다리는 일은 없었기에 더더욱 수상했다. ‘그리고, 이걸 전부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만든 건 아닐 텐데.’ 시선을 돌리면 테이블 위에 늘어진 호화로운 음식들이 날 반겼다. 나와 하루히의 자리에만 포크와 나이프가 가지런히 세팅되어있는 것이 어색했다. 내 자리에 앉으면 붉은 색의 식전 스튜가 들어왔다. 향신료가 가미된 것 같은 향이 퍽 입맛을 돌게 했다. 스튜를 수저로 휘저으니 푹 익은 고기덩이가 걸렸다. 한 입 먹으니 깊은 향과 따뜻한 온기가 몸에 돌아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이 음식들을 전부 준비시켰을 장본인은 달팽이가 상추 뜯어먹듯 음식을 깨작거릴 뿐이었지만. 눈짓으로만 슬쩍 살피면 그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용건은 그제서야 흘러나왔다. “하루에 한 번, 내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고 내걸었던 조건 기억하지?” “네, 기억하죠.” “꽃을 구해다줬으면 해. 가지째로 꺾은 아카시아 꽃.”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달랑 꽃만 꺾어다 줄 생각은 아니지? 가정교사로 고용됐으면 그에 맞는 일을 해. 하며 무심하게 이어지는 말에는 인상이 살풋 찌푸려졌지만, 금방 고갤 끄덕였다. 내가 불쾌해보이는 모습이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그는 빙그레 웃었다. 기대하고 있을게. 그러고는 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얼마간 기다릴 셈인지 냅킨을 들어 입가를 톡 톡 닦았다. “...그렇게 드시면 안되죠. 더 드세요.” 눈 질끈 감고 한 잔소리는 내가 생각해도 제법 바보같았다. 가정교사로 고용되었더니 식사를 얼마나 하는지에도 손을 대려고 하는군. 아마 그에게서는 됐다던가, 무슨 상관이냔 말이나 돌아오겠지, 싶어서 조롱당할 각오를 하고 있던 것도 잠시, 그는 의외로 내 말을 듣고서 몇 번 눈을 끔벅이다가 고기를 작게 썰어 몇 번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결코 식사를 이어가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달가워하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제법 순순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꼭, 칭찬을 바라는 것마냥. 잘 하셨어요, 하고 어색하게 내뱉은 칭찬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물론, 반어법이다— 짧게 숨소리마냥 웃음소리를 흘린 그는 잠시간 간헐적으로 키득거리다가도 이내 손에서 식기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버리는 것을 보면, 정말로 이제는 식사를 그만둘 생각인 모양이었다. 더 먹고 싶지만 몸이 안 좋아서. 저녁에 봐, 선생님. 문을 닫고 식당을 나가는 그를 보며 나 역시도 식사를 그만둘 셈이긴 했으나 절반도 줄지 않은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눈에 걸렸다. 얼마 먹지도 않을 거면 이렇게 차리는 게 무슨 소용이람. 그러면 의문이 떠오르기 십상이다. 수상하게 여유로운, 지내는 이라고는 둘밖에 없는 유령 저택. 이 저택, 정말로 망한 게 맞는지. 그리고 그 쇠락의 이유가 무엇일 것인지. - ‘그러고보니 저택 마당에 커다란 아카시아 꽃나무가 있었었지.’ 저녁까지 해야할 일이 있으니 미리 해두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가지 째로 꺾은 아카시아 나무. 그것을 어디에 쓰려는 건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묻더라도 내 알 바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 묻는 것도, 궁금해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중요한 것은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내는 거겠지. 식당을 나서 저택의 부지로 발걸음하면 죽은 갈색 잔디가 드넓게 깔린 광대한 부지 위에 눈에 띄는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아카시아 꽃나무. 가까이 다가갈수록 부지 전체를 은은하게 덮은 꽃향기가 바람과 함께 무겁게 쏟아졌다. 어떤 나무들은 죽기 전에 환하게 꽃을 피우는 종류도 있던데, 아카시아는 내가 알기에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그저 이 곳에서 유일하게 아직껏 생生을 지닌 이로써 할 일을 다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면 이 나무도 제법 오래 되었을텐데, 싶었다. 이 나무는 내가 이 곳에 있던 그 어린 시절에도 지금과 다를바없는, 아니 지금보다 더 거대해보이는 모습으로 이 곳을 지키던 나무였다. 양 팔을 벌려도 반도 안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손을 대면 사포마냥 거칠기 짝이없는 나무줄기의 질감이 가득했다. 거대한 나무 앞에 서 있으려니 참, 내가 작고 우습게 보였다. ‘내가 어떤 대단한 수완이 있더라도 사다리 없이는 잎사귀 하나 못 꺾겠군.’ 미리 창고에서 사다리나 마체테를 봐두기를 잘 했다. 큰 나무 앞에서 꽃 꺾겠다고 펄쩍펄쩍 뛰고 있는 모양새를 굳이 보이지 않아도 되었으니. 창고에서 도구를 갖고 오면, 가지를 수월하게 꺾어낼 수 있었다. 제법 예쁘게 피어있는 것을 골라서 자르려고 했건만, 어제보다는 조금 시든 것 같아 어깰 으쓱였다. 벌써 아카시아가 질 계절인 건지. 아니면 이 부지에 도는 죽음이 이 오래된 나무에도 감돌고 있는 건지.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달랑 꽃만 꺾어다 줄 생각은 아니지? 가정교사로 고용됐으면 그에 맞는 일을 해.’ 머릿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목소리는 상념을 깨뜨렸다. 가지만 뚤레뚤레 꺾어다 줘서는 좋은 소리를 듣기는 글렀을 테다. 굳이 괜한 말을, 적어도 하루히에게는 결코 듣고싶지는 않았다. 알고 있는 지식들과는 별개로 공부를 해두어야 할 테다. 원래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에는 나 또한 공부가 필요한 법이다. 하나하나 동요하지 않아야 했다. 꽃가지를 안은 채 서재로 걸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재는 비어있었다. 하루히는 아마 본인 방에서 책이라도 읽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루히가 있었다면 괜히 긴장하고 움츠러들어 자료를 조사하는 것에 집중하지 못했을 테다. 신경전은 생각보다 많은 힘을 소비하게 하니까. 신경에 거슬리는 것은 책상이 아주 엉망이란 점이다. 아버지도, 하루히도. 이 집에 있는 이들은 본디 물건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는다. 만년필이고, 서류뭉치고 마구잡이로 굴러다니는 책상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책장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나는 이 곳에서 살던 기간, 제법 오랜 시간을 서재에 있었고, 서재에 있던 책들은 대부분 읽어봤었다. 때문에 서재의 어떤 곳에 어떤 종류의 책들이 있는지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문으로 들어와 오른쪽, 코너에서 두 칸 떨어진 책장에는 자연학 책들이 꽂혀있었다. 아마 식물학에 대한 서적도 그 즈음에 꽂혀있겠지 생각하며 걸어가면, 아니나다를까 이런저런 책들이 꽂혀있었다. <아카시아 나무에 관한 진실>을 발견하면 팔락팔락 넘겨가며 눈도장으로 읽어보았다. [ 아카시아 나무는 꽃, 잎, 열매, 나무 할 것 없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꽃과 잎은 바짝 말려 차를 내리거나 식재료로 곁들여 섭취할 수 있고, 뿌리와 열매는 약효로써 사용처가 무궁무진하다. 목재는 특유의 무늬가 아름답고 고풍스러워 고급 목재로 쓰이기도 한다. ] 이런 내용이라면 설명해주어도 괜찮겠지. 서재에 있던 양피지를 꺼내 빠르게 책 내용을 필사해 내려갔다. 어떤 약효가 도는지. 차의 향은 어떤지, 빠르게 반나절만에 조잡하게나마 정리하는 수업자료를 만들기 위해 서재를 한바탕 뒤적거리는 것이 끝날 즈음에는 이미 방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에는 주황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았다. 꼭 시간을 누군가가 감아버리는 것마냥.기지개를 쭈욱 켤 즈음에는 어디에 있던 건지, 하녀장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건넸다. 식사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선생님. 다행히도 아직 완전히 힘이 빠지지 않은 꽃가지와 수업자료들을 가지고 하녀장을 따라 식당으로 갔다. - 이번에는 식당 안이 텅빈 채 조용했다. 음식과 식기들은 깔끔하게 차려져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식사할 장본인이 없었다. 몸이 안 좋으니 내려오는 것이 늦어지는 모양이지. 참,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간사하고 미련스러워서, 아픈 낯으로 아득바득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것은 더 불편해지는 것이다. 머뭇거리며 나를 데려온 하녀장에게 하루히의 몸상태에 대해 묻는 것이 나을 것인지, 아닐 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즈음, 내 옆에 있는 내 몫의 의자를 당겨주는 손길이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낯의 하루히였다. 화가 났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권태롭고, 예민한 낯빛.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그는 나를 가볍게 당겨 당겨진 의자에 앉히더니, 의자를 밀어넣고서 제 자리로 가 앉아버렸다. 성격하고는. 얼떨떨한 감상으로 입만 벙긋거리고 있으려니 그제야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보다 더 호화로워진 음식에 당황하고 있을 즈음, 하루히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한 꽃은 꺾어왔어?” 그는 의례적으로 질문을 하면서도 내가 꽃을 꺾었는지 말았는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애시당초 꽃을 꺾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확신따위가 그 무신경한 목소리에는 있었다. 그는 그러면서도, 내가 사다리가 있어 어렵진 않았다고 대답해도 들은체도 하지 않은 채로 꽃을 내라는 듯이 시큰둥하니 턱짓할 뿐이었다. 꺾어왔으면 보여주지 않고 뭐해. 오만하고 무례한 행동에 신경이 슬 거슬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얌전히 꽃가지를 그에게 내어주면 제대로 확인하는 시늉도 없이 적당히 훑고는 뒤에 선 하녀장에게 가지를 넘겨버리는 것이다. 그 쯤 깨닫는 것이 있었다. 아마 그는 정말로 내가 거대한 나무 앞에서 펄쩍거리며 뛰며 나무를 오르는 꼴이나 보고 싶었을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래서?” 언제나처럼 상념은 하루히의 목소리로 끝이 났다. 더 할 건 없냐는 듯이 고갤 슬 기울이는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조사를 안 했다간 별 빈정거림은 다 들었을지도 모르겠군, 생각하며 이내 차근차근, 서재에서 봤던 책의 내용을 알려주면, 그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로 한참을 침묵했다. 묘한 표정이다. 의중을 읽을 수 없는 시선과 두 눈으로. 별 반응이 있을 거라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할 때까지 가만히 침묵을 감내하자면, 그는 느릿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아카시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몇 개 있어. 그거 알아? 아카시아 나무는 베어낼수록 점점 더 성질이 사나워져서 결국 가시덤불이 되고 만다는 것.” “그럼 오늘 저는 저 나무를 더 사납게 만들었겠군요.” “그런 셈이네. 네가 말한대로 아카시아는 퍽 유용한 나무지만, 가시덤불이 되고나면 소용없게 되겠지. 결국 일대의 숲까지 망치게 되는거야. 순식간에 훼방꾼 꼴이 돼.” 가늘게, 꼭 환상마냥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조근조근 말을 이어가던 그는 내게서 떼지 않던 시선을 돌려 창밖으로 돌렸다. 바깥은 노오랗게 번지던 노을은 이미 지고, 달이 떠오르는 오묘한 색만이 뒤섞여 혼돈을 빚고 있었다. 차가운 듯, 따뜻한듯. 알 수 없는 빛깔이 저택의 그늘과 겹치며 하루히의 한 쪽 얼굴을 비췄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듯, 잠시 길고 고요하게 숨을 내뱉더니, 끌어올린 입꼬리에서 미소를 죽였다. 표정 없는 흰 얼굴은 창밖에서 새어나오는 어둠으로 물들어가며 창백해져갔다. “그렇게 가시가 모나 이리저리 돋친 아카시아 나무를 없애는 방법은… 그냥 내버려두는거야. 크는 건 빠른데 스스로 지탱하는 능력이 시원찮아서 한 50년 쯤 지나면 비바람에 뿌리째 뽑혀 쓰러지거든.” 추하게. 나는 그가 덧붙인 말에서 어떠한 혐오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로서는 그가 느끼는 감정의 방향을 유추할 길이 없어 그저 무게만을. 하루히는 자조하듯, 놀랍게도 자조하듯 속삭였다. 나는 말이야, 선생님.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택 마당에 있는 그 빌어먹을 나무가... 하루 빨리 뿌리채 뽑혀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내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다. 아카시아에 표하는, 혹은 그 너머의 상징에게 표하는 그의 혐오가 낯설었고,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스스로 뿌리뽑지 않은 채 기다리는 그의 인내가 낯설었다. 불쾌할 새도 없이 느껴지는 것들에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그저 침묵을 지켰고, 그는 잠시간 자리에 앉아, 예의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묘한 미소와 함께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저 식사해. 먼저 일어날게. 그의 발걸음소리는 무겁고 느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나간 문 너머에서, 메마르고 비쩍마른, 하지만 꼭 가시덤불마냥 날카로움을 담은 기침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 내 신경을 잡아두었다. 뭐지?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는 기침소리는 한참을 날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대체, 뭐지. 멍하니 문에 박혀있던 시선을 거두었을 때, 나는 이 식당에 남겨진 것이 음식이 빼곡하게 늘어서있는 융단같은 테이블과 나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거대한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 홀로 선 아까의 기분에 다시 한번 사로잡혔다. 묘한 아득함과 압박감에 무언가를 먹고 싶은 기분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그대로 식당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이 확실할 정도의 낭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식들을 식당에 내버려두고 방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줄곧 생각했다. 나는 왜 그가 내뱉는 말들이 죄 자조로 느껴졌을까. 꼭 그 애가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것 같던 건 무엇 때문이지? 가증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분노와 배신감이 일렁여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경험을 하면서도, 나는 그 기침소리가 왜 이리 가슴에 박히는지. 더는 생각을 이어가고 싶지 않아 눈을 꾹 감고 잠에 들었다. * 누나. 이 집에서 나가. 감히 다시는 돌아올 생각도 마. 무슨 일이 있더라도. 허억,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날은 새벽이었고, 더 물을 것도 없이 악몽이었다. 어린 소년의 무심한 문장은 명확했으나 그 얼굴만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의 그 애는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 -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이른 아침, 어두운 아침일 터였다. 폭풍우는 여전히 매섭게 몰려들고 있어 늑장을 부리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이 도시의 낮은 이르게 열리진 않지만, 저택에 고용된 사용인의 하루는 빠르게 시작되기 마련이지 않은가. 영국은 사시사철 비가 내리는 나라고, 오늘도 그 중 하루일